정군칠 유고시선집 '빈방'의 시(4)
♧ 한라새우란 - 정군칠
겨울의 계단을 성큼 올라온 혓바닥
적판백설의 상형문자 새겨져 있다
진갈매빛 노을이 내려앉은 적판황설은
오래 기다린 그리움의 흔적
한라영산은 기슭마다 그늘을 내려
여름날 천둥소리와 한겨울의 폭설을
땅 아래 어둠 속으로 들여앉혔으니
뿌리에 맺힌 염주를 굴린 그대 노고가 눈물겹다
그대 혓바닥에 스민 얼룩들을
그대 걸어온 곤고한 날들의 상처
세 치 혀 안의 얼룩을 뒤로 숨긴 나는
그대 앞에 합장한 오늘이
한없이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 동백 그늘
부리 붉은 새들이
몇 번 찾아 왔으나
여전히 입을 닫는 나무가 있습니다
새들은
꽃이 벙그는 순간보다
꽃을 내려놓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생이 시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인 거라
스스로 목을 거두는 木이 있습니다
새들은
비밀번호를 모른 채 여전히
도돌이표 음표만을 읽다 돌아가고
참수의 피톨들
생피 더욱 붉어진 동백동산 동백 그늘은
발효의 시간을 기다릴 뿐인,
막막한 성소입니다
♧ 천왕사 부근
하늘이 다비식을 마쳤나 보다 뿌연 잿가루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하얗게 바래어진 눈송이들 나뭇가지 위로 모여든다 침엽수 가지마다 무수히 내민 촉들이 누더기 옷을 깁느라 분주한 새벽, 실도 바늘도 없이 한 몸이 되는 순간과 마주친다
세운 날을 다스리지 못하는 마음 추스르며 일주문 지나 눈 내린 마당으로 들어선다 풍경이 한번 흔들릴 때마다 발자국이 하나씩 지워진다 나는 왜 풍경이 풍경을 울리는 추녀를 바라보게 되는 걸까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촉이 허공을 맴돈다
눈앞이 흐려진다 명부전으로 가는 돌계단의 등을 밟고 눈밭 지나간다 뒤꿈치를 든 수도꼭지가 고드름을 껴안듯 허드레 물바가지가 살얼음을 껴안듯 어깨를 감싸는 축축한 누더기 옷 한 벌 걸친 채 나는 이 적막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것이다
♧ 싹
숫눈 덮인 보리밭 한가운데
한 줌 볕이 들어
싹이라는 말의 빗장을 열면
ㅆㅆ
한 몸에 다른 한 몸 기대어
꼼지락꼼지락
젖내 맡은 아가의 발가락 같은
어젯밤 마실 나온 별의 눈目들
♧ 강정을 지난다
밤에 인적 없는 강정을 지난다
파도는 노란 깃발이 꽂혀 있는
처마까지 따라와
외삼촌 없는 외가 같은 적요 속
범섬과 문섬의 속울음을 풀어놓는다
낮에는 황건 같은 노란 깃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는데
어두워지며 찢기는 소리만 남아 펄럭인다
어쩌지 못해
순한 바람이 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싸움터가 되어버린 이곳
서로를 캄캄히 가두려
올레 담이 높아지고
마을의 집들은 서로 다른 깃발을 내걸었다
다른 바람이 어디 있었던가
남들은 화산섬이라 하지만
물 좋아 기름진 땅
바닷바람마저 범섬과 문섬을 지나며
가장 부드러운 숨결로 길들여지던 곳
나팔고동과 진홍나팔돌산호가
목숨 다해 파도를 순하게 다스리던
그곳,
일강정一江汀이라는 말 그저 나온 말 아니지
내게도 오래 묵혀 둔 말이 있었으니
그대를 마주하고 싶다는 것
그대의 가난한 무릎을 빌려
무거운 내 머리 잠시나마 얹히고 싶다는 것
하지만 나의 비애는
뒹구는 빈 소라껍질처럼, 무너진 방파제처럼
속절없다
거대한 이지스함에 떠밀릴 낡은 어선 몇 척이
던져진 듯 놓여 있는,
쉬 바닥까지 드러낸 옴팡진 포구와
벼랑으로 내몰린 노란 깃발과
낯이 맑던 바다까지 검게 변해 버린 강정
도둑게가 훔칠 그 껍데기처럼
속이 텅텅 비어가는 집들
그림자만 남은
강정, 그 마을을 지난다
* 정군칠 유고시선집 『빈방』 (고요아침,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