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이 시집 '제주야행'의 시(1)
♧ 교래 들판을 지나며
교래 들판 지나갈 때는
바람이 되리
방자하게 불어대는
바람이 되리
생각에 잠겨있는 억새꽃 수풀
가만두지 않으리
마구 흔들어 더더욱 몸부림치게 하리
산안개 몰아서
조랑말떼로 달리게 하리
산굼부리 벼랑으로 곤두박질치며
흘러가게 하리
아직 길들지 않은 들판
교래 들판 지날 때는
미친 듯한 바람으로 가리
거침없으리
♧ 발을 씻으며
저녁이면 돌아와
발을 씻는다
잔뿌리 같은
발가락들을 씻는다
비자나무 등걸에 붙어 자라는
나도풍란의 발이 떠오른다
바람 속에서
제 몫의 기쁨을
살며시 거두어 갖는 연초록 발
내 발은 어디에
기생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이 맑은 사람은
흐린 날에도 자유로워
그의 발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
저녁마다 세상으로부터
또 하나의 나에게로 돌아오는
발을 씻는다
때 묻은 마음을 벗는다
♧ 그대는 시인
들길을 걷다가
한 송이 들꽃을 만나면
허리 구부려 눈길로 입맞춤하는
그대는 시인
바람 부는 날
한 잔 술에 손 잡혀
어쩌지 못할 마음으로 떠돌다가
눈물도 없는 마른 통곡으로 가슴이 저리는
그대는 시인
저녁 바다에 지는 해를 전송하고
실연한 듯 허탈해진 발길 가누는
그대는 시인
저명인사들이 모인 리셉션에
넥타이 차림 어색해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그대는 시인
때때로
나는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거나 아닐까
그런 의문에 잠기는
그대는 시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에 눈물이 핑 도는 가슴 가득히
풋풋한 감탄사 살아있는
그대는 시인
♧ 바다 병病
그는 언제나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가에 앉아 있습니다
이야기 나눌 때도
구름 따라 변하는 바다 쪽으로
한눈을 팔아
마주앉은 사람을 싱겁게 만들어버리는
그는 내 고향 사람
수십 년 서울에서 맴돌면서
가장 그리웠던 건
바다였다고
나직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갚아야 할 빚이기에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아
병이 된 듯했습니다
한번 사로잡히면 놓여나지 못하는
우리 고향 바다의 애증은
차라리 죽을 때까지 지니고 갈
불치병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움에 미쳐본 사람은 알겁니다
바닷가를 언제까지나 배회하는
그의 마음을
♧ 그대
그대가 밤바다로 자주 나가는 건
가슴속에 파도가 많은 때문이다
부끄러울 게 아직도 많아
어둠을 빌려
축축한 마음을 꺼내면
방종의 길 재촉하듯 바람이 불고
아직도 생생한 연민
차마 깨뜨리지 못한다
날마다 부두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누군가를 실어온 듯 부르고
싸구려 술에 절어 돌아다니다가
울부짖을 곳조차 제대로 없는 그대
밤바다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속수무책인 채로
한없이 떨고 있는
그대의 파도는
그대의 어둠만 덮칠 뿐
* 김순이 시집『제주야행』(황금알,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