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의 시(8)
♧ 제논의 화살
시애틀의 배션 아일랜드에서 자전거 나무를 본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허공에 매달린 커다란 꽃 같다
녹슨 바퀴 꽃 살대마다 지나가는 햇빛
내 눈에는
자전거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껴안은 시간 속에서
자전거가 계속 달리고 있는데도
우리 눈이 멈춰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유심히 살펴보니
허공 길을 수직으로 달리는 나무와
둥근 길을 나이테 속에 내려놓은 자전거가
서로의 속도를 껴안고 있다
달려오던 속도와 뿌리박힌 속도 중
어떤 속도가
페달을 내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 영혼이 또 다른 혼에 머문 것처럼
서로의 허공을 쓰다듬고 있다
속도가 속도를 껴안는 순간,
저, 자전거나무
더 이상의 과녁이 필요 없다는 듯
딱, 멈춰 섰을 것이다
통과할 수 없는 시간이 각막에 달라붙은
거기서부터
내 눈먼 사랑도
벌겋게 녹물 번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바나나를 입에 물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건 몸에 좋지
등이 꼿꼿하게 펴지거든
헤엄쳐온 생각을 혀로 핥는데
입속으로 사라지는 아, 바나나
긴장도 희열도 없는 바나나를 씹으며
바나나에 닿는다
슬픔 따위와 이별하듯 씹혀주는 바나나
즙액도 씨앗도 없는 열매의
거만함을 생각하다가
종족에게서 멀리 떠나온
외로움에 닿는다
갓 태어난 무덤 같은 아, 바나나
철학자처럼 게걸스러운 날들과 헤어진
바나나 껍질은 이빨에 좋다
이빨에 묻은 얼룩을 하얗게 닦아준다
죽음 뒤엔
무엇이 남는지 말하지 않는 바나나
껍질만 남은 계단을 오른다
우연히 식탁에 놓여 있다
아, 바나나
♧ 안탈리아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거리에서
고고학적 사랑을 만나는 건
아프지 않다
기억 속에 밀폐된
당신과 나와의 거리를 재어 보는 일 같아서
처음 본 거리에서
속 모른 당신에게 빠지는 건
두렵지 않다
풍경이 되는 일 같아서
익숙한 느낌이 익숙해서 아플 때
헤이, 리라 꽃다발을 줄게
죽음을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나를 사랑해줘
올리브 나무를 지나온 바람처럼
나를 흔들어줘
풍경만 논하는 애인이 되어줄게
내륙의 작은 식당에서 깨물었던 올리브 절임처럼
역사와 정치를 말하지 않는 열매가 되어줄게
헤이, 어제와 내일로부터 고립된
나를 속여 봐
낡아빠진 골목을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처럼
나를 울려봐
고대 성곽을 넘은 길처럼
푸른 애인들을 투두둑, 떨구어 줄게
나 혼자 충분히, 낯선
관광지가 되어 줄게
* 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 (황금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