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의 시

김창집 2022. 10. 4. 00:02

 

 

지구에서 십 년 살아보니

 

 

  바늘귀가 들은 건 호롱불 흔들리는 이야기였지 바느질로 기운 겨울 밤하늘은 스무고개를 하며 찾아가는 길이었지 우수리에서 불어오는 북동풍, 그 차가운 목소리가 귀밑에 입을 맞췄어 어린 감나무가 있던 집 애기업게로 살다간 삼양 고모는 열여섯 살이었어 삽사리문고 읽다 까무룩 잠들면 수천 년이 흘렀던 거야 옛 이야기 속 누이는 다 슬픈 건지 솜이불 다독이는 소리 낮아졌지 비키니 옷장 속에 숨어 얼굴을 묻으면 라디오 소리가 더 잘 들렸어 엄마 키만 한 기타를 갖고 싶었어 이름 난 별자리 옆에는 탁아소가 성행이었고,

 

 

 

우리말 사전

 

 

  누굴까요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며칠 굶어 데꾼한 얼굴의 사람들은 숨을 곳을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습니다 눈 내리면 눈밥을 먹으며 솔개그늘 아래 몸을 움츠렸습니다 하룻밤 죽지 않고 버티면 대신 누군가 죽는 밤 찬바람머리에 숨어 들어온 사람들 봄 지나도 나가지 못하고 동백꽃 각혈하며 쓰러져간 사람들 사람들 꽃을 한 그릇 진설합니다

 

  누굴까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비꽃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그림자놀이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잡았을 때

눈부신 해를 바라보며 두 눈을 찡그려야 했고

 

키 큰 건물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에 앉았을 때

정오 무렵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선명하게 보였고

 

고양이는 물감을 입에 물고 가다가 깨닫고

난 이제 내일부턴 아마 달라질 것만 같고*

 

그늘에서 나오던 먼지가 나무의 돌이 되었을 때

스테이플러로 찍어둔

너의 마지막 페이지

 

여우는 손가락에서 나와

벽에 붙어먹고

때론 그림자가 길쭉하게 왜곡되듯

걸어가는 길

 

왜 사랑은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서늘할까

 

양지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 찾으러 가는 길

 

---

*들국화의 노래 <난 이제 내일부터는> 중에서.

 

 

 

솜반천길

 

 

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

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들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성환星渙

 

 

  내가 이렇게 운구차에 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처럼 날 들어주지도 않고 날 위한 시를 쓰지 못한 네가 무슨 친구냐며 시인이냐며 그런 시인 친구 필요 없다며 양지공원 어두운 한낮에 흩어진 별빛들이 구름의 목울대를 가득 채우며

  널 찾았다며 신문에 난 네 이름 보고 반가워 신문사에 전화했다며 어떻게 그 동안 연락을 안 할 수 있느냐며 치킨집에서 오백 잔을 부딪치며 다음 동창회 때 꼭 나오라며 그때 깐돌이도 온다 했다며 건강은 어떠냐는 말에 예전에 수술했는데 괜찮다며 걱정 말라며

  첫아이 태어났다며 자정 무렵 어서 산부인과로 오라며 넌 시인이니까 우리 아이 이름 지어달라며 아니면 축시라도 써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술 가득 부으라며 우리 친구지이 흥얼흥얼거리며 밤바람이 제법 찬데 걸어갈 수 있다며 나도 이제 아빠가 됐다며 너도 빨리 결혼하라며

  제대하고 고향에 와서 백수일 때 다니던 회사 거래처 공업사에 나를 취직시켜주며 집에만 있지 말고 일하면서 시 쓰라며 그리고 시 쓰려면 연애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잘 봐둔 경리 아가씨가 있는데 시 쓴다 해도 뭐라 하지 않을 정도로 착하다며 넌 시를 쓰니까 고백을 시로 해보라며

  우리 서로 군대 있는 동안 서로에게 위문편지를 써주자며 넌 시를 좋아하니까 편지 대신 시를 써서 보내주면 되겠다며 강원도 철원 밤하늘 바라보며 쓴 시를 보내줬더니 답장에 경기도 파주 밤하늘도 별이 흩어진다며

  고등학교 졸업 앞둔 겨울방학 함께 바다에 가자며 넌 시인이 꿈이니까 나중에 시인이 되면 날 위해 시를 써주라며 바닷가에 글씨를 쓰면 파도가 지워버리는 열아홉 살 아이는 셋 낳을 거라며 네가 시를 쓰면 제목을 내 이름 성환으로 해달라며

 

 

 

              *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