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의 시

♧ 지구에서 십 년 살아보니
바늘귀가 들은 건 호롱불 흔들리는 이야기였지 바느질로 기운 겨울 밤하늘은 스무고개를 하며 찾아가는 길이었지 우수리에서 불어오는 북동풍, 그 차가운 목소리가 귀밑에 입을 맞췄어 어린 감나무가 있던 집 애기업게로 살다간 삼양 고모는 열여섯 살이었어 삽사리문고 읽다 까무룩 잠들면 수천 년이 흘렀던 거야 옛 이야기 속 누이는 다 슬픈 건지 솜이불 다독이는 소리 낮아졌지 비키니 옷장 속에 숨어 얼굴을 묻으면 라디오 소리가 더 잘 들렸어 엄마 키만 한 기타를 갖고 싶었어 이름 난 별자리 옆에는 탁아소가 성행이었고,

♧ 우리말 사전
누굴까요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며칠 굶어 데꾼한 얼굴의 사람들은 숨을 곳을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습니다 눈 내리면 눈밥을 먹으며 솔개그늘 아래 몸을 움츠렸습니다 하룻밤 죽지 않고 버티면 대신 누군가 죽는 밤 찬바람머리에 숨어 들어온 사람들 봄 지나도 나가지 못하고 동백꽃 각혈하며 쓰러져간 사람들 사람들 꽃을 한 그릇 진설합니다
누굴까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비꽃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 그림자놀이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잡았을 때
눈부신 해를 바라보며 두 눈을 찡그려야 했고
키 큰 건물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에 앉았을 때
정오 무렵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선명하게 보였고
고양이는 물감을 입에 물고 가다가 깨닫고
난 이제 내일부턴 아마 달라질 것만 같고*
그늘에서 나오던 먼지가 나무의 돌이 되었을 때
스테이플러로 찍어둔
너의 마지막 페이지
여우는 손가락에서 나와
벽에 붙어먹고
때론 그림자가 길쭉하게 왜곡되듯
걸어가는 길
왜 사랑은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서늘할까
양지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 찾으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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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의 노래 <난 이제 내일부터는> 중에서.

♧ 솜반천길
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
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들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 성환星渙
내가 이렇게 운구차에 실리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처럼 날 들어주지도 않고 날 위한 시를 쓰지 못한 네가 무슨 친구냐며 시인이냐며 그런 시인 친구 필요 없다며 양지공원 어두운 한낮에 흩어진 별빛들이 구름의 목울대를 가득 채우며
널 찾았다며 신문에 난 네 이름 보고 반가워 신문사에 전화했다며 어떻게 그 동안 연락을 안 할 수 있느냐며 치킨집에서 오백 잔을 부딪치며 다음 동창회 때 꼭 나오라며 그때 깐돌이도 온다 했다며 건강은 어떠냐는 말에 예전에 수술했는데 괜찮다며 걱정 말라며
첫아이 태어났다며 자정 무렵 어서 산부인과로 오라며 넌 시인이니까 우리 아이 이름 지어달라며 아니면 축시라도 써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술 가득 부으라며 우리 친구지이 흥얼흥얼거리며 밤바람이 제법 찬데 걸어갈 수 있다며 나도 이제 아빠가 됐다며 너도 빨리 결혼하라며
제대하고 고향에 와서 백수일 때 다니던 회사 거래처 공업사에 나를 취직시켜주며 집에만 있지 말고 일하면서 시 쓰라며 그리고 시 쓰려면 연애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잘 봐둔 경리 아가씨가 있는데 시 쓴다 해도 뭐라 하지 않을 정도로 착하다며 넌 시를 쓰니까 고백을 시로 해보라며
우리 서로 군대 있는 동안 서로에게 위문편지를 써주자며 넌 시를 좋아하니까 편지 대신 시를 써서 보내주면 되겠다며 강원도 철원 밤하늘 바라보며 쓴 시를 보내줬더니 답장에 경기도 파주 밤하늘도 별이 흩어진다며
고등학교 졸업 앞둔 겨울방학 함께 바다에 가자며 넌 시인이 꿈이니까 나중에 시인이 되면 날 위해 시를 써주라며 바닷가에 글씨를 쓰면 파도가 지워버리는 열아홉 살 아이는 셋 낳을 거라며 네가 시를 쓰면 제목을 내 이름 성환으로 해달라며
*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 2018)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