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의 시(9)

김창집 2022. 10. 6. 02:48

 

 

한 알의 사원

 

감나무 가지가

까치밥 하나 껴안고 있다

 

까치밥이 흘러내린

붉은 밥알 껴안고 있다

 

판막증을 앓는 심장처럼

옆구리가 터져도

 

제 몸의 붉은 즙을 비워내지 못하는

, 까치밥

 

오랫동안

식솔을 껴안아 온 몸인 거다

 

까치가 날아와 숟가락 얹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 온

밥그릇인 거다

 

나무가 제 몸을 밀어내도

사바세계

얼어붙은 손 놓지 못하는

한 알의 밥그릇 사원인 거다

 

 

 

 

비오는 날의 연가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웅덩이 위에 고이는 가벼움으로

누군가에게 물결 져 갈 때

바람에 부딪혀

동그란 평온이 흔들리고

비스듬히 꽂힐지 모르겠지만

문득, 그렇게 부딪히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를 만나고 싶다

창문을 두들기는 간절함으로

누군가 비밀 번호를 누를 때

바람에 흩날려

흐르던 노래가 지워지고

희미하게 얼룩질지 모르지만

한순간, 그렇게 젖어들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 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

가두거나 가볍게 굴릴 수 없는

투명한 세계나무의 나이테처럼

옹이 지거나

수갑 채우지는 않겠다

 

컵이나 주전자에

자유롭게 담기는 사유의 기쁨으로

빗방울 같은 내가

빗방울 같은 너에게

다만, 그렇게 담겨지고 싶다

 

 

 

히말라야의 민들레

 

 

노랗게 태양 빛을 판각하는 민들레를 봄의

가장 긴 문장이라 하자

어떤 그늘도 갖지 않은 그 문장이 잘 읽히는 것은

무릎보다 낮은 바닥에 피어 있기 때문,

황금사원이 써내려간 마지막 문장은 홀씨

티베트어를 모르는 나는

새에게 날개를 내준 바람의 감탄사를

읊조릴 뿐이지만

하늘을 수식하는 희디흰 빛에

남몰래 울었네

얼룩진 기도문처럼 노파의 굽은 등 뒤로

흘러내리는 저, 흰빛

슬픔이 먼 길 걸어오는 동안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은

내 이마 위에서도 나풀거렸네

티베트 하늘처럼 높고 맑은 것에 마음을 걸어보니

이제 알겠네

납작하게 엎드려 핀 뒤통수들이

왜 그리 환한 문장인지

지상의 구멍을 채우는 단추처럼

민들레 세필이 회화문자 쓰는 하늘은

또 다른 바닥이어서

흰 깃을 단 이생이 서럽지만은 않네

 

 

                                    *강영은의 PPE 산수국 통신(황금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