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순이 시선집 '제주야행'의 시(3)

김창집 2022. 10. 7. 00:56

 

 

앓고 있는 너에게

 

 

앓고 있다는 네 소식

나를 아프게 한다

 

타오르는 용암을

가슴에 지녀 살겠노라고

잠깐의 고임에도 괴로워하며

여윈 몸 통째로 사르며

숨차게 흐르는 너

 

이 삶에서 건져 올릴

지푸라기 하나조차도

때론 가혹하게

우리를 걷어차느니

 

열 오른 이마에

손 한 번 짚어주지 못하고

나는 그저 멀리서

아린 가슴으로 두 손만 모을 뿐이다

 

눈부신 몸 껴안고

겨울잠 한숨 자고 깨듯이

그렇게 일어날 수 있겠지 너는

 

 

 

 

눈물의 길은 깨끗하다

 

 

비 오는 날은

하늘만 허물어져 내리는 건 아니다

가슴 깊이 여민 눈물

한바탕 허물어져 흘러간다

헤아릴 수 없는 죄를 지어

이 세상 어느 곳

발붙일 데 없다 해도

눈물의 길은 깨끗하다

상처 없는 가슴을

가슴이라 할 수 있는가

눈물의 길 되밟아 가면

아름다운 상처가 있다

밝히라 그 상처 위에

하나씩의 등불을

 

 

 

인동 창

 

 

못 견딜 때마다 창가로 간다.

어머니가 심어준 인동 꽃

봄마다 향기롭다

목숨의 줄기 허공 벽에 부딪혀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져도

한사코 뻗어 휘감아 잡는 덩굴손

내게 지니라고

모진 겨울 칼바람에

앗기지 않는 잎새의 푸름

내게 지니라고

어머니가 심어준 눈물어린 당부

머리맡 창가에 늘 푸르다

 

 

 

미친 사랑의 노래 5

 

 

내 아버지 누이

미쳐서 죽었다

43사태 피해서 일본 간 지아비

찾아서 밀항선 타고 들락거리다가

사랑의 그리움에 침몰해 버렸다

어떤 의사도 건져내지 못하였다

격정의 소용돌이 속의 그녀

사랑하는 사람 위해서 지은 옷 한 벌

보따리에 싸안고 부둣가 서성이며

날마다 날마다 마른 가지로 여위어

새까맣게 타죽었다 그리움의 불길에

풀조차 돋지 않는 그 무덤에서

들려온다

죽어서도 부르는 미친 사랑의 노랫소리

 

 

 

 

제주바다

 

 

나는 흑조黑潮에서 태어났다

저 소금기 많은 생명의 조류

해가 솟는 아침과

달이 뜨는 저녁을

흐르는 피 속에 지녀

기쁨과 슬픔 기울고 차며

끝없이 파도친다

아슬아슬 벼랑길 같은 세상

청맹과니로 건너며

사랑한다 피고 지는 덧없음을

소리치며 흘러가는 제주바다

나의 바다는

떠나가는 눈물을 실어 보내고

돌아오는 눈물을 실어 오느니

저 끊임없이 부활하는 생명의 흐름

내게서 출렁이는 동안은

나는 노래하리

아름다운 제주바다를

 

 

                        *김순이 시선집 제주야행濟州夜行(황금알,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