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현택훈 시집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의 시(2)

김창집 2022. 10. 9. 00:59

 

 

 

소녀의 꿈

 

 

  엄마, 난 커서 해녀가 될 거예요. 바닷속에 집을 짓고 낮엔 그 속에 들어가 살 거에요. 전복으로 지붕을 올린 집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놀 거에요. 그 집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집. 집 앞엔 꽃도 심을 거예요. 해초들이 물결에 흔들리며 내게 손짓을 하겠죠.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평생 물질을 하시고도 바다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던 걸 나는 들었어요. 할머니가 바닷속 집에서 나를 반겨 줄 거예요. 엄마, 난 커서 해녀가 될 거예요.

 

 

 

 

리조트만 봐도 그래

 

 

항구 근처 호텔에 투숙했는데 유리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생은 이 정도쯤은 감내해야 하는 걸까

 

꿈에 임을 만나서 좋은 일이 생길 거라 기대했는데

호텔 창밖 하얗게 빛나던 벽이 생각났다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누워 잠든 밤은 깊었다

 

일기예보에서 눈이 온다고 했는데 눈은 오지 않았다

보름만 지나면 봄이고 코코아 유통기한은 쓸데없이 길다

깨끗하고 투명한 호텔 유리창이 까닭 없이

 

소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지만

그녀가 떠난 이유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열세 살 바다

 

 

그때 난 처음 알았어

바다가 푸르지 않고 붉다는 걸

 

부끄러움보다 뜨거운 바다에서

나는 아주 오래 머물 거라 생각했어

 

전복이나 소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검붉은 내장을 떼면서

 

바다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어

바닷물이 피가 되어 돌았어

 

 

 

음악 시간

 

 

지금 내가 다리를 떠는 것은

누군가 나를 흔들고 있어서야

오늘처럼 비 오는 밤이었지

그녀가 탬버린을 흔들었어

 

저녁에 휘파람 불면

유리창에 흐르는 하모니카 소리

하모니카 구멍에 그득한 겨울바람

가만히 떨리는 전깃줄

 

나뭇잎 피크로 연주하는 어쿠스틱 기타

그녀의 방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

나뭇잎에 언제나 무성했지

바람에 흔들리는 어쿠스틱 기타 소리

 

어금니가 둥, 시외버스가 두둥,

계절이 두두둥

그녀는 북 속에 들어가 살고 있네

둥 두둥 두두둥

 

비에 젖은 악보는 물에 번져서

반음 정도는 틀려도 상관없지

 

 

 

 

못다 쓴 시

   -정군칠 시인

 

 

오일장 할머니 장터에 가서

할머니 거친 손 들여다보고

철공소에서 튀는 불꽃을

또 가만히 들여다보고

봄꽃나무 즐비한 꽃집 앞에서

에쎄 클래식 한 대 피우고

삼덕빌라 202호로 들어와

봄동 배춧국으로 점심을 먹고

금성 오디오로 레너드 코헨 들으며

베란다 야고 분갈이를 하고

도서관 시 창작 교실 강의 자료를 만들고

필사노트에 좋은 시 한 편 옮겨 쓰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는

외동딸에게 이메일로 안부를 묻고

지난 주말에 찍은 동백 낙화 사진을

블로그에 옮겨 놓고

에쎄 클래식 한 대 피우는데

시가 스멀스멀 신병身病으로 다가온다

어둠이 찻잔 속으로

침몰한다

 

 

          * 현택훈 시집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 2018)에서

                                              * 사진 : 해녀와 돌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