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의 시(3)

♧ 우정 출연
내가 떠날까 봐 불안해한 적 없다는 걸 나는 알지 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네가 나를 붙잡으려 한 적이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떠난다 해도 너는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 있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알지 못하지 않는다
그래도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난 노래해요
커피는 깊어가고 식은 밥을 먹어도 상관없는
부드럽게가 하루하게 흘러간다
젖은 빨래를 널어놓으면 형광등 불빛이 마르니까
커튼을 흔드는 빗방울 소리만 들어도 시를 써요
아주 멀리 가봤자 바닷가
까맣게 잊어봤자 구상나무가 기억한다
그리워하면, 만날 수 있다면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나무 전봇대에게 귀띔해요
슬어놓은 알처럼 붙어있다
도롱이처럼 매달려 있다
무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버짐처럼 피어난다
염소 똥처럼 동글동글해져요
여름날 돌멩이처럼 따뜻해져요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귀뚜라미가 울면 복숭아가 익어요
넘기지 않은 달력처럼 어두워요

♧ 거북손
거북은 죽어 갯바위가 되고
내 손을 잡아줘
내 손을 잡아줘
바닷물 머금고 손을 내민다

♧ 유선노트
구름부터 담으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와 버렸다
안개를 빼고 쓴다면 부드러운 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겠지
그러면 독서실 푸른 창문까지 선을 이을 수 있을까
말하자면 노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아득하고 지난한 일
밤 바닷가에서 알몸으로 물에 들어갔던 날들의 달빛은
수많은 선으로 그어져 있어서 노트엔
납작하고 메마른 겨울이 잠들어 있다
그런 거라면 서랍 속에서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에게 물을까
라디오를 빼고 말하면 복잡한 회로도 실마리가 풀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해답이 눈에 보여서 오히려 어려운 문제
책상이라면 용서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서면
낭떠러지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미리 넘겨보곤 하니까
소풍을 가지 못한 다람쥐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방에 넣거나 들고 다니기에 적당한 꿈으로 기록되었다
사람들은 새 노트를 펼쳤다가 이미
누군가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괜스레 옆에 있던 사람의 안부가 궁금한 척 편지를 쓴다
그러면 속눈썹이라는 가시가 축축한 채 돋아있는 노트가
눈을 뜬다

♧ 저 불빛
아주 가끔 유리병 속 내 집에
노래가 스며들곤 해
물결에 흔들려 희붐한 문손잡이
문을 열면 밀려드는 바닷물
창밖으로 떨어진 다이어리
컵에 어두침침한 그림자가 차올라
혼자 잠들도 혼자 거울 앞에 서는
바닷바람의 눈동자에 눈물이 흥건해
유리창에 얼핏 비친 누군가 낯익은데
어둠이 느리게 헤엄쳐 다니는 방
서랍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해구
해령을 이룬 옷장엔 옷들이 해초처럼 흔들려
유리병 속 집에서 창밖으로 보는
저 멀리 바닷가 불빛
핸드폰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는
흐리멍덩한 손가락
내 손을 잡지는 마
잡으면 손이 뭉개져버리니까
바닷가 모래 위에 나라가 있었지
유리병 속 시간이 밀물에 깎여
바다 속에서 바라보는
저 별빛

♧ 화성 착륙 기념우표
손을 담그면 작고 여린 물고기들이 살랑거립니다.
답장을 하지 않으면 불행이 되는 행운의 편지가 사는 섬에서 삽니다. 그때 행운의 편지를 부치지 못한 죄로 나는 많은 불행을 안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누구는 그 편지를 받고 부치지 않았다가 거리의 악사가 되고, 또 누구는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은 죄로 감각을 잃었다는데……. 불행이 오면 그 편지의 발신지를 추적하고 싶어집니다.
연못의 물은 밤이면 다시 맑게 차오릅니다.
맨 처음 편지를 쓴 사람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편지를 퍼트린 사람들이 편지에 주술을 걸었겠지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살아남으면 돼. 다른 사람들은 죽든 말든 나랑 상관없다며 물고기의 시를 쓰고 또 썼을 것입니다. 우편함에는 손가락이나 눈알이 들어 있을 때도 있어서 무화과가 놀라 뒤로 자빠지기도 합니다. 나는 어젯밤에도 늦은 답장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일부러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편지를 쓸 테니 받으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립니다. 나는 며칠 전 또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설마 행운의 편지는 아니겠지, 했는데 이젠 감동이 있을 뿐더러 문장마저 아름다운, 행운의 편지였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찢어버리려다 한 자 한 자 정성 드려 필사했습니다.
글자들이 송사리들처럼 헤엄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근사하게 쓴 행운의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그 편지를 받고 다른 누군가에게 보낼 행운의 편지를 또 쓰지 않으면 철퇴를 맞은 것처럼 아파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이게 할 시를 쓰게 만드는 편지를.
손에선 비린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 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걷는사람, 2018)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