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3)
♧ 시래기국 - 이순향
청정한 무시래기
가마솥에 삶은 중에
고향의 가을내음
천상까지 번졌는지
어느 새
아버지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건다.
♧ 별 눈 - 김정식
새벽 별빛 마시며 세상 쓸고 비탈길 담아 오시던 날,
아버지는 가로등 불빛 창고 아래 손수레를 들어 올려
세상을 부으셨다
취기 오른 막걸리 페트병이 찌그러진 채 뒹굴며 나오고
술 냄새 찌던 소주병도 굴러 나왔다
병들 이젠 그만 닦고 모으세요. 그것 얼마나 된다고……
푸념의 화살을 페트병에 꽂았다
터진 병 속 화살촉 사이로 오물과 분뇨가 흘러나왔다
아서라, 돈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매일 씻겨 줘야지
분뇨 묻은 병을 닦으며 광주리에 분리하다 역겨워
코를 막고 뛰쳐나간 누나와 나
정성껏 담아두는 오물 묻은 아버지의 작은 손이
오늘 빛바랜 사진 속에서 유달리 커 보였다
아버지는 쑥과 마늘을 오랫동안 드셨나 보다
어두운 곳에서 별빛을 오랫동안 마셨나 보다
세상을 맑게 닦아 주신 하늘나라 환인 옆
별 눈,
오늘 밤 서늘한 구름 사이로 더 반짝였다
♧ 강변북로에서 - 홍인우
여든 길목 홀로 되신 아버지
긴 목이 여름에도 서늘했다
보름 만에 딸 온다고
온 방의 불을 다 켜 놓으셔도
온통 습하고 침침한 집
종일 땅강아지처럼 방바닥 마주 보고
재수떼기 화투를 하셨을 아버지
더러 끗발 좋은 날
어떤 재수가 날아들었을까
오랜만에 마주앉아 소주잔 채워 드릴 때
저주 터지던 헛기침이 눈물인 것을 모른 척
등 두드려 드리고 돌아오던 강변북로에서
나도 치미는 헛기침에 자꾸만 브레이크를 밟았다
방바닥만 파던 수많은 낮과 어두워지면 더 깊어지는 창가에서 우두커니
팔광의 쓸데없이 밝은 달빛에 가슴 시렸을
노년의 갈피
물 말아 넘기는 밥이 소태일지라도
재수떼기 화투 오래 하다 보면
어쩌면 개끗발 끝에 청단 띠 두른 목단이 슬그머니 피지 않았을라나
전화벨소리 흘러넘치던 가장 깊었던 밤이 지나고
주인 잃은 방바닥이 차갑다
♧ 뱀사골에서 –전선용
계곡은 같은 소리로 울지 않는다
봄이어도 겨울이었을 상처들에 대해
한 잎 베어 물다 던진 풋사과같이
산 색깔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고로쇠 젖을 빨면서 봄빛 스며들기까지
그들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나는 이쪽, 너는 저쪽
왼손 오른손을 구별한 건 하나님의 실수다
빛이 흩어 놓은 미끼를 문 계곡, 순교의 노을이
개처럼 짖을 때, 화톳불씨 같은 별은
타닥대지 않고 사그라졌다
계곡물에 손을 넣고 온기를 풀면 닫힌 입을 뗄까
파르티잔 봄은 얼음장 같아서
동사한 입이 바위처럼 단단하다
독사에 물린 계곡은 뇌사 상태
영문 몰라 정체된 울음에 대해
얼마만 한 값을 지불해야 해빙이 될지
봄 청군, 가을 홍군 사이로
소풍 즐기는 산새 움직임이 수상하다
계곡 이쪽과 저쪽 사이
철조망 같은 냉풍이 흐르는 뱀사골
아리랑 넘는 이,
누구인가.
♧ 적 – 이장욱
진정한 적은 내 안에 있다……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왜냐하면 그건 신비로운 말일 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말이기 때문에
한때는 바보처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아니다. 그 새끼는
인간도 아니야.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 파시스트가 있었지.
그이는 진정한 철학자였어.
오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림자를 생산하고
어제를 생산하고 또 사악한
적을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림자처럼 나를 미행하는 분이시여, 등 뒤의 악령이시여, 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시여.
당신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준다.
나에게 의욕을 준다.
나를 재구성한다.
당신이 그러하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창밖의 하늘을 보아요. 불안정한 대기와 함께 다가오는
구름에 가까운
저 전체주의적 크리처들을
눈앞에 보이는 것을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를 때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라고 야훼는 말씀하셨지.
우리가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듯이
친구여, 우리는 피를 흘리며
헤어집시다. 먼 곳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로 해요. 언젠가는 간결한
부고를 전해주어요.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심연에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 월간 『우리詩』 2022년 10월호(통권412호)에서
* 사진 : 요즘의 사철나무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