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5)
♧ 고목 – 허유미
혼자라도 사이를 만들면
만지고 싶은 말들이 돋아
사이가 다시 사이를 다시 사이를
혼자라는 리듬을 숨김없이 드러내면
어둠이라 하고
고독이라 했다
어둠도 고독도 내가 가진 장소일 뿐
울음은 아니다
♧ 산지천에서 낚시할래요 – 황문희
부두 근처, 바다로 연결된 내 끄트머리
깨끗하게 조성된 생태공원에는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싹둑 잘려나가
아이 업고 빨래하던 여인들은 멸종한 지 오래,
아무래도 시린 물에서는 때가 잘 빠지지 않습니다
하천의 꼬리를 바닷물이 낚아 올리고
낚시꾼의 양동이에서
동그랗게 몸을 만 장어가 초승달을 낚아 올리고
나무 그림자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가 빠져나와
예전 그녀들의 얼굴을 한 채 양동이에 빠집니다
펄떡, 장어처럼 뛰어오르던 여자가
썰물을 낚는 사내와 팔짱을 낍니다
여기에선 아직도 민물장어가 쏠쏠하게 잡혀요
놀다 가실래요
어디서요
저기 안쪽 구석으로요
여자는 낚싯대를 낚아채 사내들을 매달았습니다
낚시꾼은 서로를 곁눈질하고
엉덩이를 내만 여자는 그들이 제 발로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
지긋이,
여자의 팔짱을 풀지도 않으면서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 사내들
사이,
낚싯줄이 팽팽해집니다
사내 하나를 낚아 올리고
업소 여자는 다시 그림자가 됩니다
먹고사는 일이라도 몰래 하는 수밖에 없어
밝은 세상에서는
긴 꼬리로 헤엄치며 바다를 낚던 여인들이 멸종한지 오래,
썰물이 빠져나간 하천에는 아무래도 소금기가 다 빠지지 않습니다
‘음주, 흡연 없는 깨끗한 공원’
팻말이 때때로 바람을 낚아 올리면
눈꼬리들이 길게 흩어집니다
♧ 이순우 – 김경훈
-이덕구의 사촌
사형 집행 전 소고기국에 흰쌀밥이 나왔지
이순우는 모두기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지.
“이건 최후의 만찬이다.
여기까지 와서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지도 말자.
우리는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다.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나가자.”
이순우는 토벌당국에도 당당하게 한 마디 했지.
“나를 포함해서 수십 명은 진짜 빨치산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대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의 선전과 강요로 따라온 사람들이다.
부디 그 사람들을 살려 달라.”
이순우는 10월 2일, 제주읍 정뜨르비행장에서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과 함께 집단 처형당했지.
인민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목숨을 바쳤지.
♧ 오늘도 나는 오린다 – 나기철
유난히 햇살 살가운 창밖
뒤로 하고 일인용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깎아 온 참외를 찍어먹으며
신문을 읽는다
오늘은
<러, 오데샤 미사일 공격에 3개월 영아
숨져… “이 아이가 무슨 위협”>이란
제목의 기사
나는 매일 가위를 들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기사를 오린다
싸악싸악
침공 며칠 후부터
기사를 오리고 날짜를 쓰고
비닐 스크랩북에 끼워넣는다
40매짜리가 두 권 가득
60매짜리 두 권을 더 사왔다
옆 베란다엔 두꺼운 것들이 수십 권
스크랩 하는 데는 힘이 하나도 안 든다
4․3평화공원이 있는
제주의 중산간 명도암마을
창밖 수(樹)평선 가득하고
새들 자지러지고
흰 구름 발랄한 곳
오늘도 나는 가위를 들고
일인용 소파에 얌전히 앉아
‘러, 우크라이나 침공’
기사를 오린다
사악사악
내일 새벽부터 제주 산지에
300mm 넘는 비가 오고 돌풍도
불겠다 한다
♧ 비자림 콘서트 – 김항신
화려한 동백들의 향연
코로나 펜데믹 끼고 우리는 걸었다
얼마 만에 와본 숲이던가
우린 자연스레 자리를 잡아
한 곡 한 곡 낭송이 이어지고
팔공시대, 이루지 못했던
남녀의 사랑이
‘아침 편지’로
촉촉이 가슴 적시던 시절
그 시린 사연이
비자림 숲에서
목메인
울음으로
향연 불러낼 때
우리는
‘사랑이여’를 부른다
약속이나 하듯
선율은
‘비자림’에 빛을 발한다
영원한 동백의 세레나데를
* 계간 『제주작가』2022년 가을호(통권78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