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 시집 '하늘로 흐르는 강'의 시(7)
♧ 춘설 속에서 유사遺事를 쓰다
을유년乙酉年 경칩에 큰 눈이 내렸다
백년을 기다린
고로쇠 가지마다 눈꽃은 피어
앉을 자리를 잃은 새들이 격론 끝에
산 너머로 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하얀 빛의 무게에 놀란 산이, 고요히
해가 떠도 입을 열지 않자
눈밭에 선혈 낭자히
약수터 겹동백만 애꿎게, 뚝뚝
제 모가지를 부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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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 2005년 경칩에 300m를 넘는 100년만의 폭설이 전국과 부산, 경남지역에 내렸다.
♧ 하늘로 흐르는 강
보세요, 저 – 기 저 – 어 – 기
하늘로 흐르는 강을요
출발은 저자바닥
얽히고설킨 난장이었지만
비우고 비워 흐르다 보면
실낱처럼 가벼워진 몸
써레봉 바위도 물길을 열어
하늘에 다다르는 중봉 오솔길을요
♧ 천불동 가을
어머나
냇바닥에 불이 났네
옛날 누구 속앓이로 앓던 불
저런, 저런
산천어 놀라 허둥대고
개여울로 불 번지네
♧ 모닥불 지펴보면 압니다
장당골 어린 자작나무들
밤새워 흔들며 흔들리며
푸른 손짓으로 맞이해 품고 있던
결 고운 나이테 속의 하얀 별빛들
다시 가을밤의 별이 되어 날아가는
가슴에 모닥불 지펴보면 압니다.
은하의 저-편
또, 누군가의 흔들리는
손짓이 있다는 것을
♧ 갈참나무 숲이 잎을 지우는 것은 2
키 낮은 것들 위해
한여름에 그늘 만들고
한겨울엔 볕 더 들이려는,
비탈에 서는 법 배운 나무들의
눈물겨움
* 권경업 시집 『하늘로 흐르는 강』 (작가마을, 200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