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5)

♧ 늦가을 - 조병기
시외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날 일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차창에 기대면 붉어가는 나뭇잎들이 반갑고
머리칼 나부끼는 바람도 향기롭다
들녘 노랑방울 벼이삭들 출렁이고
채전 밭 무 배추 알이 차서 일손을 기다리고
산모퉁이 돌아나면 억새꽃 내 머릿결
어쩌자고 하늘 구름은 따라오라고
저리 손짓을 하나
그리움도 위안이라
산다는 건 언제나 낯선 길
혼자서 찾아가는 길
찬바람 불어오기 전 어디로든 떠나자
만날 약속보다 아름다운 이 이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돌아온다는 약속도 묻지 말고
어디로든 길 떠날 일이다

♧ 소리쟁이 – 이규홍
소리가 그리워 두 귀를
쫑긋 세우는 식물이 있다
소의 귀처럼
안테나를 뽑아 올리면
그의 몸에는 온갖 소리들로 가득하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재잘거리는 참새 소리
가을밤을 지새우는 귀뚜라미 소리
새벽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구름처럼 번지는 웃음소리까지
저 작은 잎 속에 모든 걸 담아낼 수 있을까
소리가 더욱 그리운 날이면
홀로 소리를 만들기도 하는
사람보다 영특한 소리쟁이
세상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추며
마음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는
그의 소중한 일과를 엿듣고 있다

♧ 곡비 소리 – 이화인
겨울나무에 귀신이 산다
봄 봄
봄이 오려면 아직도 이른데
잔설을 딛고 서 있는 나무에서 들려오는
귀신을 부르는 곡비 소리
봄을 갈망하는 나무에 깊숙이 휘둘리는
귀신들이 울부짖는 소리
잉 잉
봄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철딱서니 꽃샘바람에 쫓겨 황급히 도망치는
아기 귀신 채근 소리
혼비백산 달아나느라 신발이 벗겨지고
뒤꿈치 까지는 소리

♧ 주여 제발 – 박동남
주님 제발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전봇대가 소변기로 보여 영역표시 하지 않게 하시며
담이 안방 벽으로 보이지 않게 하시며
들으세요
드세요
차를 권하는 스님의 신과
점잖게 술을 마시는
선비 신까지만 나오게 하시고
미쳐서 개처럼 날뛰는
아니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미친놈 신은 나오지 않게 하소서
주님 이름으로 마십니다
에이 씨 맨

♧ 산책로에서 - 성숙옥
탁해진 시간을 거르는 길에서
향긋한 빛을 밟는 발들을 본다
참새 떼는 경쾌한 리듬으로 날아다니고
나무 그림자는 나직이 발밑으로 깔린다
간간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발자국 소리
비둘기처럼 부른 적 없는 생각이 와서 구구거리는 사이
벚나무 가지가 떨구는 둥글고 푸른빛을 손에 쥐어 본다
나는 이 푸른빛을 발에 묶고 걸어야 한다
행여 검은 오해와 불신의 말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이 빛을 비추며 걸어가야지
그날이 그날 같은
별일 없는 오늘이 내일의 기도가 되는데
어제와 내일을 모르는 고양이 한 마리, 풀숲을 벗고 나와
투명한 눈빛 쏘며
천천히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월간 『우리詩』2022년 11월호(통권 제413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