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조' 2022 제31호의 시조(2)
♧ 수평선
호박 같은
둥근 세상
갑을甲乙 인생
모질거니
수심 깊은 저 먼 바다
하늘가에 맞닿았으니
눈높이
넘보지 마라
하늘
밑줄
그
었
거
니
♧ 달아나고 싶었네 – 김미영
귤 익는 소리가 하락하락 들려온다
이문은 고사하고 처리만도 다행이라고
황금색 그 하나 믿고 달려온 해거름녘
귤 농사 글 농사 사람 농사 사랑 농사
건져 볼 거 하나 없는 또 한 해가 저물어
힘 빼고 기다려보자 농사는 배신을 안 한다며
♧ 시를 빚는 반딧불이 – 김영기
빛이 없으매 몸으로 빛을 내
입이 없으매 빛으로 말을 해
한마디 신호면 된다
반짝반짝! “사랑해!”
생략하고 절제하는 폐기한 수사학에
황홀히 다가오는 와이모토 반디 별빛
동굴 속 묽리을 따라
한 줄 시를 남긴다
♧ 뜨거운 씽어즈* - 김영란
내게도 쓸쓸하던 그 골목이 있었을까
허기처럼 따라온 시간을 붙잡으면 비릿한 그리움 하나 혼자 울고 있겠지 기어이 떠나간 사랑 새도록 비는 오고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그 다음 밤도 기다리겠다는** 팔순의 뜨거운 독백 끊일 듯이 이어져 시처럼 연기처럼 슬픔의 근성들이 하나둘 내 가슴에 시린 뼈를 묻을 때
슬퍼요, 클릭 대신에 안아주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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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비 프로 제목
** 노래 ‘나의 옛날이야기’ 가사 일부.
♧ 당신의 밤은 아침보다 환하다 - 김연미
등 뒤에서 바라보면 대책 없이 눈물이 났지
그 눈물 온기만으로 한 땀 한 땀 이어진 숨
아늑한 그림자 뒤에서 잠이 들곤 했었지
인연과 인연 사이 낡은 옷감 덧대며
어머니 바느질 소리 어린 꿈을 수놓고
감치고 누벼가면서 나를 기워내셨지
방 안 가득 일렁이던 고단한 시간의 끝
동녘 창 해 뜨는 쪽에다 나를 걸어 놓으시고
밤 지샌 등잔불 끄고 바다 건너가신 이
설문대 치마폭 같은 일출봉 산허리에
등경돌로 만나는 그리움의 저 깊이
오래된 들국 하나가 무릎 꿇고 있었다
* 제주시조시인협회 『제주시조』 2022 제3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