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1)
♧ 들리나요 - 여국현
밤하늘을 오르는 달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
구름 뒤에서 숨바꼭질하며 재잘대는 별들의 소리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며 소곤대는 바람 소리
가을 나무 머뭇거리며 하나둘 옷 벗는 소리
두물머리 두 강물 수줍은 듯 몸 섞는 소리
깊고 짙은 어둠이 소리 없이 웅얼거리는 자장가 소리
잠든 새들이 꿈속에서 제 짝을 찾아 부르는 노랫소리
천변 갈대들 바람에 온몸 맡기고 춤추며 내는 휘파람 소리
먼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들이 서로를 인도하는 울음소리
어둠과 달과 구름과 별빛에 깃든 영혼들의 낮은 한숨소리
들리나요
곤히 잠든 그대 꿈속으로 걸어가는
내 영혼의 발자국 소리
♧ 야식 – 김동호
“먹는 즐거움은 크다
야를 빌미로 야식의 재미
줄이면 안 된다”
그 소리에 끌려
밤새 먹거리 골목 곳곳을
누빈 때가 있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야식이
지금은 가장 재미없는
야식이 되고 있다
요즘의 야식 메뉴:
진통제 소염제 수면제
항-우울제…
♧ 푸르른 날에는 - 정순영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 날아갈 듯
푸르른 날에는
해파랑 하늘을 한 움큼 따서
영혼을 흠뻑 적시고
내 안에서부터 해맑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사랑하라 사랑하라
이름도 목숨도 다 내어 주어라
사랑으로 내 안에 하늘이슬이 고이는
푸르른 날에는
♧ 남천 – 이인평
남천은 잎이 붉기도 하지
코로나 확진자가 십칠만 명이 넘었어도
베란다의 남천은 창밖 겨울을 보며
햇살의 양감에 속살까지 붉지
바라보는 내 마음도 붉어져서
이내 봄이 오면
저리 뜨거운 사랑을 안고
새 힘에 안기고 싶어라
코로나도 겨울도 꼬리를 감추는
작은 꿈 하나 풀어 두고
아지랑이처럼 고즈넉이 설레는
파릇파릇 새순 같은 은총 속에서
기쁨을 풀고 싶어라
♧ 겨울 그리고 방 - 성숙옥
겨울이 된바람 소리로 다가오면
낡은 외투 같은 시간으로 들어간다
어둠의 봉우리를 넘다 그만 갈까 망설인 날들이다
햇빛을 묶어 놓지 못한 바닥은
가끔 연탄보일러까지 붉은 기운을 놓곤 해
북쪽의 한기가 밀린 고지서 같이 들어오곤 했다
내려오는 위풍의 밀도를 담요로 희석하며
삼십 촉 전등과 넘던 글자의 고개
벽에 그려지는 벽을 아랫목의 온기에 펼치며
고드름처럼 가느다란 뼈들을 골랐다
어떤 날엔 두부 장수 종소리가 새벽 문풍지를 흔들 때까지 잠을 쫓던 방
가슴에 사그라지는 불씨를 후후 불며
더 빠른 지름길이 있는지 새로 돋을 꽃을 그리며 영혼을 불어넣던 방
긴 겨울을 푸른 불꽃에 올리며
노을은 다시 새벽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다
* 월간 『우리詩』 2022년 12월호(통권41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