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2)

♧ 겨울, 거울 – 김세형
누가 이 계절을 어둡다 했는가?
이 순백의 빛나는 계절을!
영혼을 비추는 이 계절을!
난 겨울에 나를 본다.
나의 어두운 영혼을 본다.
울긋불긋 푸릇 봄 여름 가을엔
결코 볼 수 없었던 나를.

♧ 감꽃 편지 – 유정자
허공으로 스러진 저녁연기처럼
아련하게 흩어진
그날의 향기
알록달록 감물 든 치마를 입고
감꽃처럼 해맑게 웃던 상고머리 소녀야
둥근 박 환하게 열린 헛간 앞 도랑에서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를 잡고 있구나
신선한 바람결에 산책 나선 오후
여기저기 흩어진 여린 감꼭지들
그날의 둥근 박처럼 나를 보며 웃는다
오십여 년 흘렀어도 감꽃 향기 그윽해서
오늘의 편지가 낯설지 않다.

♧ 멀꿀나무 꽃을 보았네 - 김완
병원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주차 관리하는 박 실장, 건물주인 친구와 나 셋이서 점심 식사를 하네 친구와 둘이서 돌아가며 밥을 사는데 점심 식사 후에는 뚜에이오* 라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네 커피는 점심값을 내지 않은 사람이 사는 게 관례네 커피 가게 내에 문학 관련 책과 시집도 있어 언젠가 이야기를 나누고 내 시집을 선물한 적이 있는 이곳 사장은 올 때마다 참으로 친절한 미소로 반가워하네
좁은 동네라 고혈압 약을 타러 오는 내 환자도 더러 만나 눈인사도 나누네 구불구불 골목길 담장 너머로는 꽃잔치가 한창이고 어느 집 담장에 모르는 꽃이 있어 사진을 찍어 검색해 보니 ‘으름덩굴과 멀꿀 속에 속하는 상록 활엽 만경목’ 인 “멀꿀나무 꽃”이라 하네 꽃향기가 좋아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하고 심장근육의 수축력을 증강시키고 소변을 잘못 보는 증상에 쓰기도 한다 하네
꽃이 이쁘기도 하지만 그런 효능이 있다면 전립선 비대증으로 힘들어하는, 어쩐지 요즈음 심장의 수축력이 떨어진 듯 무기력한 나에게 참 멋진 나무이구나 가만히 생각을 하게 되네 오랫동안 현대의학을 전공한 나에게도 대대로 전해 내려온 동양의학에 대한 유전자가 남아 있는 것만 같네 동네 골목길을 걷다가 멀꿀 나무 꽃 공부를 하게 되어 사람 냄새나는 이 동네가 더욱 좋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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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 e io: 이태리 말로 너와 나.

♧ 여음餘音 - 민구식
해마다 하루쯤 저녁을
부석사 범종 소리 앞에 선다
마루금을 넘으려는 소리가
관管을 쓰고 행차를 하면
귀들은 이구耳垢*를 털어내고
제 속으로 공명共鳴을 다듬는다
제 몸의 울림통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무자기無自欺* 진동
귀가 젖어 있지 않고는
미세한 떨림을 감지 못할 관통 후의 여음
종을 떠난 소리는
누군가의 가슴 안에 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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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 귀에 껴 있는 때.
*무자기 : 자신에게 속지 않는다.

♧ 판타지풍으로* - 서숙희
-영일만
보름밤이면 달은, 바다를 범한다
검은 맨살로 누운 알몸의 바다를
한사코 미끈대면서 달아나려는 바다를
한껏 부푼 중천을 단숨에 들이켜고
참았던 둥근 끈도 거침없이 풀어 던지고
바다의 검은 살 위에서 허옇게 달은 죽어
수천수만의 물고기 떼 일시에 부화하여
만灣 가득 비릿한 비늘 터는 소리들,
건너편 붉은 제철소가
쇳덩이를 쑥쑥 낳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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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ata quasi una fantasia,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에 붙인 표제.
* 월간 『우리詩』 12월호(통권 414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