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조' 2022 제31호의 시조(5)
♧ 감나무 – 문혜영
전깃줄에 앉았네
제 아이 잃더니
둥지 잃고 허둥대던
누이 닮은 그 바람
둥지에 감하나 품고
누이처럼 앉았더라
귓전을 울리는
모자란 년 뺨 한 대
열매 하나 들지 않던
세 살 먹은 감나무에
잎사귀 뒤 숨었더라
감 하나 품은 내 누이가
♧ 모과나무 – 송두영
평생을 정원 속에 눈길 끌던 나무가
어느 날 힘없이 푸른 잎 내려놓아
힘들게 시들다 마른
가지 끝 그 꿈들
해마다 붉은 꽃
껍질 벗던 그 봄을
죽으면 잊힐까 내던진 독백이
욕심을 갓 넘긴 이 길
장맛비에 젖는다
♧ 배롱나무꽃 사설 – 양상보
아홉 살 새 색시가 시집가던 바로 그날 열세 살 새 신랑이 말에서 떨어져서
아, 이런 운명이라니 생과부가 되었는데요,
남편 따라 죽자 하던 그 마음을 내려놓고 묘소를 지키며 산 한 평생 효부의 길 신평리 ‘열녀오씨지문’* 또 한 세상 여는데요,
가슴속 멍울 같은 오름과 오름 사이 돌처럼 살았기에 돌을 깎아 세운 집에
여든 해, 배롱나무꽃 이어 달려 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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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대정읍 소재.
♧ 울돌목 – 오영호
바다가 우는 소리에
충무공 넋이 번쩍
소용돌이치지 않은 삶이 있기나 하냐고
솟구쳐 행방을 찾듯
멈칫하는 케이블카
♧ 가을은 – 이경숙
긴 여름 뙤약볕을 온전히 받아내는 거
설익은 초록 사랑을 빨갛게 익히는 거
거미줄 고추잠자리처럼 몸무게를 줄이는 거
나란히 벌레에 먹혀 맛있는 요리되는 거
서로의 옥수수 알을 겨울 되어 봐주는 거
비교는 하지 않으며 작은 일도 반기는 거
* 제주시조시인협회 간 『제주시조』 2022 제3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