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의 시(12)
♧ 단골
꽃이 그리 많아도
눈길 가는 색이 있다
들꽃이 그리 짙어도
손길 가는 향이 있다
선술집
최고라지만
발길 닿는 맛이 있다
♧ 늦은 결심
만 71세 되는 아침에
딱 하나
결심했다
불같이 복받쳐도
침을 꿀꺽 삼키자
화내면
쌓은 공덕 모두
한꺼번에
날아감을
♧ 참 어렵다
얼큰하다와 칼칼하다를
구별 못하는 바보 시인
먹기는 잘 먹는다
부끄럽지도 않는가 봐
아, 맵다
그까진 알겠는데
그 다음은
표현 못 함
♧ 적당히
‘이젠 정리하며
적당히 살아야지’
70 넘은 아침
굳게 다짐했었다
온종일
생각해봐도
‘적당’을 모르겠다
일은 몇 시간 해야
휴식이 달콤한지
책은 얼마를 읽어야
가슴에 담기는지
드디어
오늘 알았다
‘적당’이 무엇인지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감나무 전정하고
잔디밭 금창초 솎고
평상에 허리 펴면
화선지
먹물 번지듯
쉬는 맛 익어간다
♧ 49년생
49년생 누구는
국무총리 한다는데
나는 대체 무엇일까
이름 없는 시인이다
꽃무릇
화려함에 취해
비틀비틀
와 이리 좋노
♧ 거슨새미 둘레길
1.
비자나무 숲 지나
삼나무 그늘에 서다
호젓함
이 또한 좋아
혼자 웃다 또
웃다
난 들꿩
도토리 줍다
햇살 꽉 찼다
2.
거슨새미 둘레길에
애인 하나 생겼다
꼭 껴안고 입 맞추면
향기 어찌 그윽한지
한 아름
비자나무가
늘 그 자리 지켜 섰다
3.
굼부리 절반 돌아
거슨새미 정상이다
안돌 밧돌 체오름까지
손 뻗으면 와 닿을 듯
옹달샘
맑은 전설은
왜 거슬러 흐르는가
♧ 오죽하면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외려 그걸 즐기나 보다
네 실수가
내 즐거움
픽 웃으며 고소해하는
돈 주며
야구장 간다
안 되는 걸 보는 재미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 (한그루, 2022)에서
*사진 : 봄을 기다리는 들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