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풀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3)
[집중 조명] 양민숙 시인
♧ 머물다 가는 것들
이 나무와 그쪽 나무의 거리를 재본다
한발 반, 하늘로 뻗은 직선과 직선 사이
머물다 가는 것이 많다
오랫동안 고요하다고
떨림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직선을 받쳐 든 그 아래, 서로에게 발 뻗어
한 몸이 된 지 오래인데
당신과 나의 거리는
한발 반, 휘어진 가슴과 가슴 사이
상처만 머물다 간다
♧ 가난한 날엔 비가 내렸다
한림읍 금능리 1379번지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지붕을 고치셨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다가 줄줄 흐르다가
벽면까지 곰팡이로 물들이는 그 원인을
어머니는 가난이 아니라 게으름이라고 불렀다
양동이 몇 개 받쳐놓았다가
날 좋으면 그때 지붕에 오르라 해도
비오는 날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지붕에 오르셨다
가난한 날, 왜 그리 비는 자주 내리는지
어머니는 지붕에 앉아 계신 날이 많았다
지붕을 고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몸으로 우리를 덮은 것이라고
어린 남매가 가난이란 단어를 꺼내지 못하도록
슬쩍 자리를 피하신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된 나는 다시,
어머니의 어린 손녀에게 시간을 이야기 한다.
한림읍 금능리 1379번지
비가 오는 날이면 안부가 궁금하다
♧ 어머니의 시간
어머니는 납작해진 배를 본다
아들이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자장가를 불러주었지
낮은 음계에 맞춰 배를 일정간격으로 두드리는 손장단
이제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배를 두드린다
이미 납작해진 어머니의 배는
마른 가죽으로 뒤덮여 있어
퉁퉁 소리가 아닌 탁탁 소리가 난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뱃속의 이물감은
낡은 신경을 자극해 오늘이 헛헛하고
어머니는 매일
납작한 배를 두드리고 긁어내리며
바짝 자른 손톱에 핏물을 묻힌다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배앓이는
며느리를 ‘아주망’이라 부르는
절정에 다다라서야 나았다
치매 한 방울이 뚝 떨어진 자리에
한 장 한 장 기록되어진
어머니의 시간이 뭉개지고
추억은 흘러내려 흩어지고 희석되어
오염되기 전 흰색 바탕으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납작한 배를 보지 않고
두드리지 않는다
이제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웅크린 채 방을 만든다
아들의 아기가 되어간다
♧ 겨울나무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옆에 뿌리를 내린 덩굴은
시간과 비례하며 나무를 감고 올라갔다
원래의 공간은 틀어졌다
나무의 길은 휘어지며 꺾였고
아흔의 초입에서 흐릿해져
마치 길이 끊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덩굴이 비대해지는 만큼
기억은 사라지고 해체되고 침식되어
점점 말라만 갔다
소멸된 시간이
앙상한 그림으로 다가왔다
오래 전 기억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를 밀어내며
살아온 순서가 뒤섞인 자리,
모두 나눠주고 덩굴만 울창해진
뉴런숲*의 겨울나무
한그루,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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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런은 신경세포를 뜻하며, 뉴런숲은 신경세포가 가득한 뇌라는 뜻으로 보통 기억이 왜곡되거나 지워진 사람의 병을 일컫는다.
♧ 간혹 가슴을 연다
간헐적으로 바람을 가르는 향
찔레를 품었다
처음엔 바다였다가
다음엔 들판의 푸르른 풀잎이었다가
이제 찔레로 옮겨간 바람
햇살은
몸을 보여준 꼭 그만큼만
자리를 내어주는데
무성한 잎사귀 뒤
퇴색된 찔레 한 송이
점점 기력이 다해갈 때쯤이면
찔레를 머금은 빗금 친 바람
이제 내게로 다가온다
간혹 가슴을 연다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문학』 2022년 제1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