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문학' 2022 제2호의 시(2)
[김정자 시인 특집]
♧ 서문통거리
가을이 오면
울타리 안마다 빨갛게 익은 감이
동화보다 아름답던 서문통거리
이제 길만 휘영청 넓어지고
토종감나무 초가 없어지고
빌딩의 그늘을
더듬더듬 옮기다 보면
어디 갔다 돌아온
앳된 소녀시절이
내 손을 잡고 놓지 않는구나
관덕정 언저리의 낭만
알맞은 위치에 있던 대지다방은
人 문학 동인들만의
우정의 오아시스
♧ 차 한 잔의 삽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마시는
따끈한 찻잔에서
이 세상 어디쯤에 묻어둔
진한 사랑빛 抒情이
아직은 식지 않아
외로움으로, 또 그리움으로
되살아 피어오른다
하늘이 구름을 이고
땅이 풀꽃을 피워도
始作은 늘 먼 데에 있고
어스름녘 還生의 목탁소리에
내 인생의 장단이 절로 실려
오만도 비겁도 낭만도 순수도
위선처럼이나 너무도 조용하게
고여 있음이여
♧ 성묘 하는 날
어머니 누워계신
해안동 하늘 길에
산 꿩이 운다
부르는 이 없이
불려온 나는
생의 고갯길에 앉아
마른 눈물만 적신다
어머니 흘리셨던 속울음으로
♧ 제주 해녀
열 길 물속 바다에 뜬 섬처럼
가장 춥고 외로운 날
뭍으로 일어서는 바다마을의 주인
제주 해녀여!
생과 사를 넘나드는 날렵한 존재로
키보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해안도로 따라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간다
자식 많이 낳은 죄밖에 없는데
뇌선으로 배 채워도 눈 하나 꿈적 않고
은물결 출렁이듯 가슴에 와 박히는
애달픈 숨비소리
♧ 녹슨 유모차
채울 게 없는 바구니에
한평생의 기록물을 담고
미련을 밀고 간다
세월을 밀고 간다
약속도 없이
기다리는 이 없이
두고 온 듯한 세월의 조각들을
녹슨 유모차에 담고
알 수 없는 세월을 기다리며
내가
나를
밀고 간다
시간을 밀고 간다
♧ 더 작아진 내일
삶은 소풍 같아
각본이 없었지
연습도 없는 이별을
마중하고 배웅하며
밤새 안녕
예고 없는 내일을 기약하지
어제보다 조금 더 작아진 내일을
마중하지
*동백문학회 간 『동백문학』 2022 제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