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제주작가' 2022 겨울호의 시(7)

♧ 벚꽃이 지는 것은 - 강덕환
벚꽃이 지는 것은
새싹 돋을 자리가 간지러워
자꾸만 살비듬 털어내는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벚꽃이 한꺼번에 지는 것은
하루빨리 싹을 틔워 잎사귀를 넓히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서
쉬고, 자고, 먹을 수 있는
평화가 깃든다면, 벚꽃이
무더기로 무더기로 진들 무슨 소용이랴.
축복처럼 비처럼 벚꽃 쏟아지고
그 빗물 얻어 마셔 싹이 돋는다면
벚꽃이 진들, 봄이 간들
무슨 대수랴.
직박구리 날자 우수수수
벚꽃이 지면서 기우뚱
중심축을 잃었던 우주도
가까스로 바로 섰다, 순리다

♧ 다시 촛불을 들며 - 김경훈
ㅡ故 양용찬 열사 31주기 추모제에 부쳐
열사여
정작 민주도 없고 자유도 없던 것들은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열사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공정도 없고 상식도 없는
국민의 힘을 우습게 여기는 것들은
자유를 남발하며
국민의힘이라는 이름으로
156명의 생목숨을 압살했습니다
민주를 짓밟고 자유를 짓밟고
공정을 짓밟고 상식을 짓밟고
정의를 짓밟고 국민을 짓밟고 있습니다
열사여
우리는 이 나라가
성조기 우러르며 욱일기에 경례하는
그런 넋 나간 족속들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는 이 나라가
빨갱이 종북타령이나 하는
그런 얼빠진 인종들의 나라가 아니라
한줌도 안 되는 것들의 가증스런 농단으로
국제적으로 쪽팔리는 나라가 아니라
위풍당당한 대한민국을 원합니다
우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대한민국
우리는 자주적이고 정의로운 통일한국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저 얼빠지고 넋 나간 것들을 멸절하기 위해
진정한 국민의 힘으로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 촛불 속에 그런 나라 그런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열사여
그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십시오
중중모리 자진모리 북치고 장구치고*
우리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십시오
---
*열사의 시, '건설, 그리고' 중에서

♧ 소 – 김광렬
쇠파이프 사이로 얼굴 내밀고 여물을 먹던 소가
쇠파이프와 쇠파이프 좁은 틈에 목이 끼었다
다급히 두 손으로 꺼내려 안간힘썼으나
그럴수록 쇠파이프는 더 깊이 목을 조였다
눈 흰자위 실핏줄 시뻘겋게 핏발 곤두서고
겁먹은 눈알이 까만 공처럼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면서
입에서 굵다란 침이 연거푸 질질 흘러나왔다
서둘러 쇠파이프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느슨해지자 그때야 안심이 되었는지 소가,
아픔과 기쁨의 눈물 뒤범벅된 눈망울을 하고
긴 혀 내밀어 그의 볼을 쓱쓱 맑게 핥아주었다

♧ 멀구슬나무가 사는 법 - 김병택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지금 막 도착한 집 마당에 서서
작은 잎들이 녹색 물결을 이루는
키가 큰 멀구슬나무를 바라본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무엇인가를
결심하는 젊은이와 영락없이 닮았다
늘 하늘을 향해 크게 손짓하는
꼭대기의 무질서한 줄기들도
시간과 함께 성장한 것임은 확실하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감도는 날에도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웃고 있는,
아담하고 화사한 몸짓의 부잣집
관목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비 내리는 날의 예고 없는 소음을
길고 긴 밤의 사막과 같은 고요를
좀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가문의 영욕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체하는 일이 없다
멍들면서, 때로 반짝이면서
역사는 갑과 을의 교집합 속에 있다는
명백한 사실조차, 모르는 척하기 일쑤다
멀구슬나무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키가 큰 나무로만 남고자 한다

♧ 바굼지오름 - 김성주
할머니의 친정집은 귀일중학교 앞 팽나무 안 집
시집은 오도롱 감남 집
모진 시국에 다 잃고
어린 손주 손잡고 친정에 간다
싸락눈 날리는 신작로 걸어
친정아버님 기제 지내러 간다
바굼지오름 지날 때
잔잔한 미소로 번지던 처녀 시절 얘기
저 오름에서 소 몰고 온종일 지내셨다는 그 말
할머니 나이 되어 그 바굼지 속을 들여다본다
* 제주작가회의 간 『제주작가』 2022 겨울호(통권 79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