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칠 시집 '물집'의 시(3)
♧ 나비 상여
외따로 난 산길
나비 날개를 어깨에 맨 개미들 간다
죽어서 맴돌기를 멈춘 나비
오색무늬 제 몸이 만장이 된다
♧ 벌초
예닐곱에 죽은 이름도 모르는 형의 산소에 MP3 이어폰 한쪽을 놓는다 투정을 부리듯 비릿한 풀내음이 낫 끝에 묻어난다
아버지 산소 앞 상석에 담배 한 대 올린다. 풍년초를 피우시던 입맛, 박하향 가느다란 궐련을 마다하지 않으실까
“콜레스톨이 낮다네요. 어머니” 봉분의 엉겅퀴를 뽑을 때 뚝, 뿌리가 끊긴다 엉겅퀴 가시에 찔린 살 속으로 끈적끈적한 액체가 스며든다
풀비린내 가시지 않는 손으로 가정의학사전을 뒤적인다
안구다습증
♧ 할머니 장터는 나의 태반이다
새벽잠 설친 할머니의 고개가 자꾸만 한낮의 태양 아래로 기운다. 그 사이 몇 개의 채반은 비워지고 고이춤의 꼬깃꼬깃한 지전이 할머니 이마 주름을 한 겹씩 끌어당길 때, 올이 성긴 삼베적삼 사이로 드러나는 젖가슴. 늙은 거미의 집처럼 유선을 따라 젖이 돌던 자리, 뿔뿔이 흩어진 젖니들의 기억 환한 그 자리가 뭉클하다.
염장이 손길 스친 어머니 마른 젖가슴, 젖배 곯던 물기들은 내 눈썹 아래 아직도 그대로여서 몇 개의 비닐봉지로는 저 터진 물집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빠듯한 지전을 수도 없이 건네주던 어머니가 차곡차곡 채반을 거둬들인다 그 안에 겹상추 그늘의 애벌레로 고인 나 말라가며 가벼워진 채만은 나의 태반胎盤이다
♧ 지주목
디스크를 앓는 맏형
열다섯 터울인 나는 어린나무였다
마디 굵은 지주목에 등 기대면
달착지근한 아버지 냄새가 풍겼다
내가 서너 차례 어긋났을 때
비바람에 무너진 과수원 돌담을 고쳐 쌓듯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등허리
서서히 헐거워진 몸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나도 입 무성한 성목인데
허옇게 센 머리와 아픈 허리 곧추세운 지주목은
퇴행된 디스크에 각인되어 있는
가계의 멍에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허리를 펼 때 우두둑 뼈마디 성긴 소리가
끙, 목을 타넘지 못하는 소리로 변주되는
지주목
바람 세찬 날이면 아직도
그 한쪽 어깨에 온몸 기대고 싶은 때가 있다
♧ 붉은 꽃
전갈좌로 태어난 나는, 손톱을 기르고 있습니다 손톱이 자랄수록 내 눈은 자주 손톱 끝에 머무는데요 손을 오므리면 길게 자란 새끼손가락 손톱이 생명선에 닿지요 새끼손가락에 힘을 주면 목젖 근처 칼칼한 갈증이 번개를 만난 것 같고 더욱 세게 누르면 숨이 막혀 오지요 덜컥 겁이 나 손을 펼치면 손바닥에 피어나는 꽃 아, 거기 붉은 꽃 핍니다
꽃은 참, 독충이나 그 무엇엔가 된통 가슴을 찔리고 나서야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더운 김이 피어오르고 버섯구름이 떠다니고 찔레꽃 피었다 지고 깨꽃이 피었다 지고 실핏줄 따라 이어진 생명선에 결국 무우수꽃 마저 차례로 피었다 지고
하루에 한두 번씩 나는 새끼손가락 손톱으로 생명선을 누릅니다 독으로 독을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럴 때마다 붉은 꽃 피는 목숨, 나를 죽인다는 것은 품었던 독을 안으로 돌려주는 것, 마음에 고인 독으로 누구를 겨냥하겠는지요. 꽃들도 뾰족한 칼끝으로 제 몸을 찌르고서야 비로소 꽃이 되지 않나요
* 정군칠 시집 『물집』 (애지.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