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산수국에 꽂혔던 날

김창집 2022. 7. 4. 00:06

 

제4호 태풍 에어리의 영향으로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던 날,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하려 숲으로 간 곳이

족은노꼬메와 그 주변 숲길이었다.

 

숲에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풀냄새와 꽃향기가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햇볕이 드는 길이나

숲 사이에는 온통 산수국이 이어진다.

 

아시다시피 산수국은 아주 작은 꽃들이 편평꽃차례로 피어나고

무성꽃(클로버처럼 생긴 나비나 벌을 모으기 위한 꽃)

꼭 꽃처럼 크게 피어 나댄다.

 

그리고 진짜 꽃들의 꽃가루받이가 끝나고 열매가 맺히면

무성꽃은 임무를 다하고 뒤집어져 버린다.

 

그런데 그 중에 진짜 꽃으로는 종자 번식이 모자라는지

무성꽃 가운데에 진짜의 작은 꽃들을 달아 피우는 것들이 있다.

 

그런 산수국을 탐라산수국이라 이름 붙였는데

물론 다른 꽃들 중에도 어느 정도 흉내내는 것들은 있다.

 

다른 꽃들이 별로 없는 요즘

산수국을 찍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산수국꽃 - 김용택

 

아침저녁으로 다니는 산 아래 강길

오늘도 나 혼자 걸어갑니다

 

산모롱이를 지나 한참 가면

바람결처럼 누가 내 옷자락을 가만가만 잡는 것도 같고

새벽 물소리처럼 나를 가만가만 부르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를 그냥 지나갑니다

 

오늘도 그 자리 거기를 지나는데

누군가 또 바람같이 가만가만 내 옷깃을 살며시 잡는 것도 같고

물소리같이 가만가만 부르는 것 같아도

나는 그냥 갑니다

그냥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가만히 흔들렸던 것 같은

나무이파리를 바라봅니다

그냥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갑니다

다시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가만히 서 있다가

흔들렸던 것 같은 나뭇잎을 가만히 들춰봅니다

, 찬물이 맑게 갠 옹달샘 위에

산수국 꽃 몇 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나비같이 금방 건드리면

소리 없이 날아갈 것 같은

꽃 이파리가 이쁘디이쁜

산수국 꽃 몇 송이가 거기 피어 있었습니다

 

 

 

산수국 - 최원정

 

푸른 나비

떼 지어

꽃으로 피었다

 

그 꽃 위로

하늘빛 내려 와

나비방석 빚어 놓았으니

잠시 쉬었다 가자

 

다리 쭉 뻗고 앉아서

긴 호흡으로

가쁜 숨 고르며

갈 길, 서둘지 말고

 

가만히 봐

푸른 나비가

꽃으로 핀

저 고요한 날개짓

 

 

 

산수국 - 김승기

 

타는 여름

메마른 언덕배기 위에

멈춰버린 풍차

흉물스럽게 서 있다

 

봄부터 시작된 가뭄

바람마저 그친지 오래다

 

가을은 아직 멀리 있는데

계속되는 여름 건조주의보

더 이상 물로는 전기를 만들 수 없다

비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동심의 천정

옹알이하는 아가의 눈동자

그 깊은 우물 안에서

파랑나비로 날던 모빌,

색 바랜 사진으로 남게 할 수는 없다

 

쳐다보면 별빛 하나 없는 밤거리

외로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눈맞춤하고 싶은 갈증

그 끝에서 돋는 바람개비

다시 돌려야 한다

 

내 안의 마르지 않는 풍차

푸른 바람개비를 위하여

 

 

 

산수국 - 김인호

   --섬진강 편지 20

 

보란 것 없이 사는 일

늘 헛되구나 그랬었는데

 

왕시루봉 느진목재 오르는

칙칙한 숲 그늘에 가려

잘디잘고 화사하지도 않은

제 꽃으로는 어쩔 수 없어

커다랗게 하얀, 혹은 자줏빛

몇 송이 헛꽃을 피워놓고

벌나비 불러들여 열매를 맺는

산수국 애잔한 삶 들여다보니

 

헛되다고

다 헛된 것 아닌 줄 알겠구나

 

 

 

산수국 - 박종영

 

긴 목 가느다란 허리에

넘치는 청순함으로 달려오는 산수국,

제 얼굴을 그림자로 빛내는

오묘한 기품에 범접을 못 한다

 

추억의 웃음으로

시원한 산골 물에 살금살금 바람 일으키는

천진스러운 장난기가 아양스럽다.

 

어제 너의 주선으로 하여

임이 어김없이 찾아와 속삭였던 지난밤

숨 가쁜 그리움의 무게를 기억할 것이려니,

 

파르스름한 꽃술 달빛 받아

빛의 화신으로 일어서는 산수국,

이슬과 별이 잠든 은혜로운 얼굴 추억하려는 우리,

 

밤 안개 속으로 푸른 가슴 여는 소리,

네 아픈 매듭의 꽃 핌에서 바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