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제주작가' 2021년 봄호의 시들(3)

♧ 시간을 잊어라 - 양영길 아프리카 우간다에서는 한국 시간을 잊어버려야 했다. 잊어야만 되었다. 시차 적응을 위하여 아침 6시는 한국 시간 낮 12시 낮 12시는 한국 시간 저녁 6시 우리가 봉사활동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는 저녁 8시는 한국 시간 새벽 2시 우리들이 서로 말 섞으며 술잔을 치켜들던 시간에 우간다에서는 새벽 닭울음소리가 시작되었다. 시간을 잊으면서 한국 가족들과의 소통도 잊어야 했다. 새벽 2~3시에 한가한 소리로 잠을 깨워서는 결코 안 되었다. ‘6시간’ 이라는 시차 마음을 비워야만 시차 적응이 되는데도 잊으려고 애쓸 때마다 되살아나는 한국 시간의 그리운 얼굴들 그 때 그 크게 웃던 웃음소리들 자고 일어나던 오래된 시간도 먹고 놀던 진한 시간도 잊어야만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그러나 우..

아름다운 세상 2021.05.04

윤병주의 '오대산' 시편

♧ 산삼자리 산 사람들이 산삼을 찾아가는 기록은 없다 약초꾼이나 나물꾼이 우연히 해발 낮은 산 능선에서 산삼이 발견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삼자리가 된다 높은 준령 혹한을 이겨낸 산삼은 심마니의 입에서 몸으로 전해진 해발 천고지 삼 자리, 기가 약한 사람은 그곳에 갈 수가 없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화전민이 된 사람 중, 풍수와 산의 방향을 읽는 사람은 심마니가 되었고 근기가 약한 사람들은 밭을 일구며 살던 자리에서 몇 십 년 된 산삼이 간혹 발견된다 강원도 전역에서 산삼이 나오지만 점봉산이나 오대산, 가리왕산이나 백두대간의 준령 구름이 습기를 조율해 주는 명당의 자리여야 한다 북동쪽 음지는 음력 4월까지 눈을 이고 있다 그곳에서 혹한의 추위와 싸워 이겨내야만 봄햇살로 살아난다 극치의 음이 양의 기운이 되..

아름다운 세상 2021.05.03

홍성운의 시조와 등나무 꽃

♧ 제 딴엔 -갈등 사이 칡은 오른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으로 오른돌이 왼돌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양돌이 더덕 넝쿨이 세상을 다 쥔 듯이 ♧ 아버지의 중절모 장미꽃 한창 필 쯤 아내가 내민 선물 내리꽂는 햇살에 주눅 들지 말라며 한지 향 올올이 배인 모자를 씌워줍니다 그에 언뜻 떠오르는 안데스 산맥 사람들 남녀 모두 나들이엔 중절모를 쓴다는데 햇빛을 가리기보단 그들의 복식이겠죠 몇 살이면 중절모가 어색하지 않을까요 가만히 손을 얹어 거울 앞에 서봅니다 빙그레, 소싯적 아버지, 저를 보고 있습니다 ♧ 어머니의 등불 내가 할 수 있다면 5촉광을 발하여 구순 어머니가 온종일 머무는 방 눈높이 벽면을 세네 전구로 앉고 싶다 어머니는 나날이 거동을 줄이시고 말문을 닫았는지 방에 누워 계셔 이따금 꿈속에 들어 갈걷이를 ..

아름다운 세상 2021.05.02

백두산의 야생화를 위하여

사진을 정리하다가 백두산 야생화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젊은 시절, 중국과 수교 직전에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에 다녀왔다는 말을 들으며, 당시 일에 쫓기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여유가 없어 ‘나도 평생에 백두산을 한번 가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당시 모 연구회에 부회장직을 맡아 일을 부지런히 했다고 보상으로 1992년 여름 수교 직전 8월초에 10박 11일 동안 백두산을 거쳐 중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다음 기회는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자의반 타의반으로 답사모임에서 백두산 가고 싶어 하는 분들과 함께 제주와 심양을 오고가는 전세기를 이용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2009년 8월이었는데, 이전에 갈 때는 연변을 거쳐 가는 북파였고 당시에는 고구려 ..

아름다운 세상 2021.04.30

김순이 시인의 야생화 시편

♧ 야생란 고열로 며칠 앓고 난 후 불순물 태워버려 몸이 가볍다 헐거운 옷을 벗고 산으로 간다 바람 불지 않는 날에도 흔들리면서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맑은 촛불처럼 마음을 밝게 열어주는 꽃 기다리고 있다 산다는 것 괴로움이면서 기쁨인 것을 말없이 내게 들려주고 이슬 걸러 뽑은 침묵의 향기 나누어 준다 꽃이여 네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여 있다면 맑게맑게 살 수 있겠네. ♧ 버릴 것 다 버리면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날아간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어느 날 다 익으면 버릴 것 다 버리면 꽃씨가 되어서 한없이 가벼워져서 땅에 묻히지 않고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다 저 무한 허공으로 ♧ 그 여자의 수선화 그 여자 사는 법,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 의로운 사람을 사랑한 죄밖에 없다 그 꽃이 피는 ..

아름다운 세상 2021.04.28

'제주작가' 2021년 봄호의 시(2)

♧ 물에서 온 인형 - 고영숙 웃자란 포만감을 갖고 노는 울음소리가 없는 오늘은 욕조 속 한 점 호흡이 사라진 하늘을 여닫네 물 안에서 계속 멀어지는 서늘한 입맞춤 욕조 밖은 낯선 바다 오래 웅크려 잠든 너를 깨웠을 텐데 얼굴을 만져 볼 수 없는 어딘가 신의 흔적이 있을 거야 시퍼런 들물과 날물의 어디쯤 쉽게 부러지는 흰 국화꽃 숨 쉬지 않는 수평선을 열고 물살을 넘기지 못하고 헐떡이는 몸을 내밀어봐 맡겨진 물빛 생이 아픈 더듬더듬 열린 말문에 아가미가 돋아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네가 웃고 있다 네 이름마저 굳어버려 끊겼다 이어지던 가벼운 인사 눈물 같은 비가 내리기를 ♧ 항해 - 김광렬 내 손등에 사뿐히 내려앉던 나비가 놀라 어디론가 황급히 날아 가버린 것은 파도 떼 사납게 일렁여오는 바다처럼 내..

아름다운 세상 2021.04.27

권경업 시 '봄이 오는 지리산' 외 5편

♧ 봄이 오는 지리산 남도사투리, 인정으로 배어 있는 땅 당신이 점지한 아들들의 뜨거운 피를 무슨 시샘에 당신의 치마폭 이 산자락을 그토록 붉게 물들였나요 백무동 깊은 골 잔설이 녹고 올해도 철쭉은 그 피 그 넋으로 피는데 백두로 가는 길 아직도 멀고 천왕봉 오는 길 너무 거칠어 아서요 말어요 할머니 시샘 꽃샘바람은요 그날처럼 꽃망울들 핏빛으로 지고 잔돌평전 옛이야기 두견새 먼 울음으로 들려옵니다 ♧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림자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 산벚꽃 그늘 아래 저건 소리 없..

아름다운 세상 2021.04.25

洪海里 시 속의 봄꽃

♧ 명자꽃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황금감옥」(2008, 우리글) ♧ 꽃나무 아래 서면 눈물나는 사랑아 꽃나무 아래 서면 눈이 슬픈 사람아 이 봄날 마음 둔 것들 눈독들이다 눈멀면 꽃 지고 상처도 사라지는가 욕하지 마라, 산것들 물오른다고 죽을 줄 모르고 달려오는 저 바람 마음도 주기 전 날아가 버리고 마니 네게 주는 눈길 쌓이면 무덤 되리라 꽃은 피어 온 세상 기가 넘쳐나지만 허기진 가난이면 또 ..

아름다운 세상 202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