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계간 '제주작가' 2021년 봄호의 시조

♧ 외로운 개츠비처럼* - 김연미 가파도 등대 불빛 그녀의 눈빛 같다 이중 화산 벼랑에서 바다 쪽으로 매달린 오래된 소나무 가지 실루엣만 남을 때 사계의 불빛들이 파티를 준비한 밤 송악산 둘레길로 시월처럼 오는 남자 섬의 끝 손을 내밀어 그리움을 만진다 단 하나의 사랑은 이생의 모든 목적 수만 년 어둠을 역광으로 드리우다 오늘쯤 불을 밝히고 나를 드러내고 싶다 --- *스콧 피츠제럴드의 차용. ♧ 아몬드 블라썸 - 김영란 너에게 주고 싶다 송이송이 빛나는 꿈 그 푸른 눈망울이 뿜어내는 호기심 천 개의 눈을 열고서 이 봄 모두 가지렴 겹겹의 꽃잎들 스치고 지나가는 나무의 탄성들에 귀 기울여 보렴 너에게 다 주고 싶다 찬란한 그 사랑 ♧ 사라봉 까치 - 오영호 흐린 맘 닦고 싶어 찾아간 사라봉 숲 소나무 우..

아름다운 세상 2021.04.20

'우리詩' 2021년 4월호의 시(2)

♧ 남이 척산南二尺山 - 洪海里 고조부님 고조모님과 산이 되어 계시고 증조부님 증조모님과 뫼가 되어 계시고 할아버님 할머님과 언덕이 되어 계시고 아버님 어머님이랑 오름이 되어 계신 곳, 척산촌수尺山寸水라도 나도 산이 되고 싶어, 산속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싶어. 타향으로 떠돌다 돌아오면 포근히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 고향이란 가슴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 그 향기 같은 곳. 내 고향 남이 척산. --- *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472번지인데 지금은 청주시로 되어 있다. 집 뒤 선산에 부모님, 조부모님, 증조부님과 고조부님을 모신 산소 네 기가 자리 잡고 있다. ♧ 가슴 - 김영호 한 해가 저물어 가면 미루나무에게 눈길이 닿아 오래 머무네. 그는 무언가 부족한 나무..

아름다운 세상 2021.04.08

월간 '우리詩' 2021년 4월호의 시(1)

♧ 雪峯 장영철 화백에게 - 洪海里 설봉 자네는 북이고 북채였다 한평생 북을 치며 허공을 울었다 화선지에 맨발로 뛰노는 붓이었고 먹이었다 호탕한 웃음이 울음이었고 울어 쌓는 슬픈 웃음이었다 자네는 술이었고 물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흐르고 흘러 이제는 산봉우리를 눈으로 덮어 雪峯이 되었구려! --- *설봉 장영철 화백이 2021년 2월 25일 소천했다. 오랫동안 우리시회 행사 때마다 북과 소리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설봉, 잘 가시게! 부디 극락왕생하시게! _()_ ♧ 주정主靜 - 김영호 세상의 소음 속에서 진실이 그리워지네.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이 그리워지네. 그러나, 새해의 첫 비가 내리네. 새해의 첫 비가 내 몸 속으로 내려와 내 심혼心魂을 잔잔한 호수로 만드네. 빗물이 나의 속정俗情..

아름다운 세상 2021.04.04

'산림문학' 2021년 봄호의 시

♧ 봄날 오후 - 김귀녀 성거산 오르는 북쪽 산비탈에 띄엄띄엄 진달래가 피었다 해쓱한 얼굴이 나를 닮았다 내려오는 길 한적한 들길엔 참새 떼가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며 짹짹짹 짝을 찾는 울음소리들 같아 이맘때면 들리는 소리 앙증맞은 목소리 보통 때와 다른 소리 구애를 하는 소리 청춘! 무엇이든 좋아 까르르 까르르 웃었던 그때 같아 그 따뜻한 봄날 그 봄 날 오후 ♧ 봄날 이운移運 - 김혜천 모래로 통증을 채운 재첩껍데기 강이 내어 놓은 허벅지에 누워 멀리 잔설 쓰고 어깨를 맞댄 산맥의 너그러운 침묵을 올려다본다. 해동의 날 찾아와 시원의 물 넘쳐흘러 지리산 골골 아직도 감지 못한 눈 말라붙은 피딱지 씻겨 감기고 나면 열풍처럼 들끓던 아우성 골짜기마다 웅웅 대는 피 울음 모두 불씨 되어 흥건한 숲을 이루리..

아름다운 세상 2021.03.31

김연미 '골목의 봄' 외 6편과 으름 꽃

♧ 골목의 봄 외 6편 - 김연미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가까지 몇 생을 돌아가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점 점이될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 올레, 외로움의 시작점 살짝살짝 엿보다 마당까지 들어와 버린 결명자 서너 포기 엉거주춤 서 있다 돌담 위 틈을 엿보던 콩 넝쿨도 내려오고 초침처럼 오가던 발자국이 멈추고 고장 난 시계처럼 정지된 풍경 속으로 구부정 가을이 홀로 빈 유모차 끌며 가고 길은 늘 외로움에 시작점을 찍었지 발자국을 지우며 뿌리 내린 풀잎 사이로 황갈색 바람 한 줄기 시작점을 또..

아름다운 세상 2021.03.30

이성이 시 '나는 앞으로도' 외 4편과 배꽃

♧ 나는 앞으로도 - 이성이 나는 앞으로도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다 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지금 아기를 포기 하지 않으면 늘 죽음하고 살아야 해요 그래서 나팔관을 묶어버릴 건데 묶을까요? -나는 혼수상태에서도 손을 내저었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 무서운 힘 며칠 잊고 있었다 냉장고 속 두릅 봉지 분명 야들야들 어린 싹이었는데 화들짝 놀란다 시커멓게 쑤욱 자랐다 만져보니 억세고 거친데 가시들도 날이 선 듯 하다 차가운 냉장고 안에서 두릅의 정신은 오직 하나 살아야 한다 만을 외쳤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따라 외울수록 내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가는데 처음 나무에서 꺾였을 때도 두릅은 그랬을 테지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장점을 마구 찔렀을 것이다 푸른 힘으로 푸른 힘으로 ..

아름다운 세상 2021.03.23

'우리詩' 3월호의 시와 얼레지 꽃

♧ 고뿔 차 - 정순영 어릴 적 겨울놀이 얼음 지치는 신바람에 젖은 바짓가랑이에 고뿔이 들어오면 이마의 열을 짚으시고는 햇봄 뒷산 바위틈에 싹을 틔운 찻잎을 따서 가마솥 뚜껑에 장작불 지펴 덖어서 서늘한 그늘에 말린 작설차를 푹 달인 한 사발에 꿀 큰 숟갈로 휘휘 저어 훌훌 마시고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히도록 아랫목 이불깃을 끌어 덮으시고 잠을 다독이시면 거뜬하게 고뿔을 털던 어머님의 고뿔 차는 사랑의 명약입니다 ♧ 책 무덤 - 마경덕 첫 장을 열거나 마지막을 펼치는 손이 있다 애초에 중간은 무시한 닫힌 책은 입이 사라지고 그토록 많은 말은 침묵이 된다 주소를 달고 누런 봉투에 그대로 갇힌 책 냄비받침이나 기우뚱한 의자 다리에 깔려 죽어가는 책 낱장으로 뜯겨 딱지가 되거나 끝내 고물상으로 가서 폐지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 2021.03.21

이무자 시 '사과 참 달다' 외 4편

♧ 사과 참 달다 바람 끝에 매달려 햇살에 속 터뜨린 석류처럼 알알이 제 속 내보이더니 내게 사과 한 알을 건넨다 머뭇거리는 손 꼭 잡는 그녀 두 볼은 잘 익은 사과 빛으로 물들어 있다 “받아줄래, 사과?” 한입 베어 무니 사각거리며 들리는 어제 일 가슴 깊숙이 박힌 씨 어차피 버려야 할 것인데 입안에서 맴돌던 시큼텁텁한 산酸이 빠져 나간다 침샘에서 목으로 꼴깍 넘어가는 이 달달함 사과 참 달다 ♧ 바람을, 바람이 흔들어 시간을 담는 마을 쉼터 고목 가지마다 잔설은 남아 옷소매를 여미게 하는데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강 씨 할아버지 주름진 얼굴엔 미소가 벚꽃처럼 꽃망울을 터트린다 깔깔거리며 고목에 꽃이 피었다고 동네 아낙들 웃음소리 고목의 굽은 허리를 휘감아 나이테 깊숙이 박힌 생채기를 후빈다 꽃샘바람보다 ..

아름다운 세상 2021.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