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제주 조천 북촌마을 4․3길(4)

김창집 2020. 5. 2. 08:03

□ 처참했던 그 날의 당팟

 

  1949년 1월 17일(음1948년 12월 19일), 북촌초등학교에서 주민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는 형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총살을 시키기 위해 주변 밭들을 이용했다. 때문에 이곳 당팟 현장으로 끌려와 100여명이 희생된 것이다. 황요범 선생의 ‘애기무덤’에는 그날 저녁 식구들의 시체를 찾는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당팟, 너븐숭이, 탯질 등지에는 쓰러져 죽어있는 모습이 마치 뽑아놓은 무처럼 갈산절산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누가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제쳐보면 외삼촌이고, 바로 보면 큰이모다. 아버지는 당팟에서 죽어있다 하고 누이는 너븐숭이에서 보았다고 한다. 몸은 하나인데 거두어야 할 시체는 동서로 흩어져 죽었다. 열아흐레 푸른 달빛을 횃불삼아 밤새도록 찾아 헤매어도 여섯 살 막내는 찾을 길 없었다. 형제자매를 찾는 울부짖음은 동지섣달의 차가운 밤기운도 잠재우지 못하였다.’

 

□ 정지 퐁낭 기념비

 

  당팟 남쪽에 7개의 비석을 세우고 ‘정지퐁낭 기념비’라는 안내판을 세워, ‘이곳은 정지퐁낭과 연못이 있어 조선시대 관리들이 쉬었다가 가는 장소였다.’라 적었다. 당시 수령 약 800년의 팽나무가 있었는데, 사라호 태풍 때 쓰러지고 새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은 온전하지는 않지만 모두 조선시대 목사들의 송덕비들이다. 4기가 이름이 확인되는데, 전부 제주목사였던 분들로 정조 때 김영수(金永綏), 순조 때 윤구동(尹久東), 헌종 때 장인식(張寅植), 철종 때 백희수(白希洙) 등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이분들의 송덕비가 왜 있어야 하는지 의아해 변승규 선생의 ‘제주도 약사’(1992, 제주문화)를 보니, ‘선정(善政) 목민관(牧民官)’ 명단에 한 분도 안 끼었다.

 

  아무리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민폐를 끼치며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을까? 사실 위에 등장하는 윤구동 목사 선정비만 지금 제주에 13기가 남아 있다니, 심해도 너무 심하다. 몇 개의 비석은 4․3 당시 총을 맞아 탄흔이 시멘트로 메꾸어져 있다.

 

 당쿠들과 당팟당

 

  정지퐁낭에서 당팟을 오른쪽으로 끼고 북촌7길로 내려가다 보면 경로당 못 미쳐 오른쪽 동산에 팽나무 4그루가 보인다. 이곳이 속칭 ‘당쿠들’로 당팟당이 자리한 곳이다. 시멘트 포장이 끝나는 곳에 바닷바람에 기울어진 팽나무가 나란히 3그루 있고 동쪽으로 1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 시멘트 포장이 끝나는 곳에 울타리를 두른 당팟당이 있다.

 

  우리가 지나오며 보았던 구짓마루에 있는 것이 큰당인 본향당이고 이곳은 작은당으로 해신당(海神堂) 역할을 한다. 송악이 우거진 당 안을 보면 사철나무, 까마귀쪽나무, 보리밥나무 등이 우거졌고, 그 나무를 신목으로 하여 지전과 물색이 조금 걸렸다. 이곳에선 하르방과 할망신을 모시며 배를 지었을 때나 출어(出漁)할 때 들른다고 한다.

 

□ 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

 

  마을에서 올라와 바로 학교 정문으로 들어선다. 코로나19로 아직 개학하지 않은 교정은 언제 그런 아수라장이 벌어졌었는지 모르게 적막감이 감돈다. 오후 햇살을 받은 운동장에는 푸른 잔디가 곱게 솟아났다. 분위기로만 보면 상처가 다 아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계를 1949년 1월 17일로 돌리면, 이곳은 살육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그날 아침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리로 가다가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당황한 마을원로 10명이 군인의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본부로 갔는데,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해 버린다. 그리고는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쯤 되는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그때가 오전 11시 전후인데 무장군인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학교로 모이게 하여 온 마을을 불태운다. 이 때 모인 1000여 명의 주민 중 군경가족만 따로 분리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몇 십 명씩 끌고 나가 인근 밭에서 사살해버린다. 이 날 가옥 400여 채가 불타고 3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지금 운동장 남쪽에 ‘제주 4․3 북촌주민 참사의 현장’이란 표석을 세워 사건의 자초지종을 새겼다.

 

  ‘이곳은 제주4․3의 최대 희생지인 북촌리민 대참사의 현장이다. (중략) 이제 4․3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이 규명되고 역사의 진실이 조명되어 평화시대의 산 교육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오늘날 북촌초등학교는 그날의 참상을 말끔히 씻고, 후학양성의 산실로 우뚝 서서 70년의 새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

 

□ 오는 길에 방사탑에 들러

 

  방사탑으로 넘어가면서 ‘아이고 사건’을 떠올렸다. 학살사건 이후, 한국전쟁에 참가해 1954년에 전사한 동네청년 19세 김석태의 유골함이 현역 군인에 의해 전달되었다. 마을에서는 꽃놀림을 해주자 결의해 마을을 돌고 학교로 와서 쉬다가 5년 전을 떠올리며 희생된 영혼들에게 술 한 잔 올린다는 것이 그만 설움에 복받쳐 대성통곡을 했다가 지서에까지 알려져 이장과 책임자 10여 명이 불려가 온갖 고문을 받고 풀려난 사건이다.

 

  방사탑은 이런 주민들이 그 후에 상생과 평화로 번영을 기약하며 세운 탑이다. 제주 4․3의 비운을 상생과 평화의 이름으로 말끔히 씻고, 이 같은 액운이 다시는 이 땅 위에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영원한 발전을 염원하며 2008년에 세웠다.

 

  다행히 이번 총선의 이슈로 부각되어 4․3 특별법이 개정되고 해결의 장이 열릴 조짐이 보인다. 이번 길을 걸으며 줄곧 생각한 화두는 4․3으로 ‘순이 삼촌’ 같은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분들의 ‘치유’였다.  끝.

 

                *이 글은 제주 4.3 제72주년을 맞아 4월 28일자 '제주일보'에  게재했던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