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을 다지는 사람들
천천히 이것저것 살피다 멈춰 서서 메모하는데, 탐방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활개 치며 뛰듯이 지나간다.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여유를 갖고 살아야지, 이런 한적한 숲속에까지 저럴 필요가 있을까’ 하다가 한편 생각해보니, 저 사람들은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이 먼 곳까지 건강을 다지러 왔지 싶어 일면 이해가 간다.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건강검진을 위해 문진표를 작성해 보면, ‘귀하는 땀이 몸에 배일 정도의 운동을 일주일에 몇 회 정도 하고 계십니까?’가 나온다. 땀이 몸에 배일 정도가 되어야 호흡도 가빠지게 되고 운동효과가 있다는 얘기일 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숫ᄆᆞ르숲길을 다 걸어도 큰 운동효과는 기대할 수 없겠다. 이 숲길은 높낮이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장생의 숲길로 이어지는 ‘숫ᄆᆞ르편백숲길’로 발을 돌리는 것이리라.
출발점에서 1.3km 되는 곳은 ‘샛개오리오름 삼거리’다. 오른쪽으로는 가면 샛개오리오름 오르는 가파른 길이어서 오르면 운동효과가 상승하게 된다. 그보다 덜한 곳으로 갈려면 ‘분기점’ 간판이 나온 뒤 나타나는 갈래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그곳은 샛오름과 족은오름이 만나는 고갯길로 거길 지나면 샛개오리로 통과했던 사람들과도 만나게 된다. 그곳 편백숲에는 평상이 여러 개 놓여 있어 푹 쉬거나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 오름 이름에 대하여
그냥 숫ᄆᆞ르숲길만 걸을 사람은 무심코 그길로 쫓아가서는 안 된다. 세거리에서 가다 분기점 간판이 보이면 돌아와 안내 표지를 보면서 왼쪽으로 가야 한다. 개오리오름은 그 넓이가 640,913㎡나 되어서, 숲길은 오름의 분화구이거나 자락에 포함될 정도로 넓다.
이름은 1997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간한 ‘제주의 오름’에는 ‘개오리오름’이라고 우리말로 나왔지만, 그전에 이루어진 관련 지명은 보통 한자 이름 ‘견월악(犬月岳)’으로 쓴다. 우리나라의 지명은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본디 우리말 이름을 가졌었다. 그러던 것이 공식 문자가 한자가 되면서 필요에 따라 바꿔 쓰게 되었는데, 그냥 음만 빌려서 표기하기 어려워 훈까지 빌리다 보니 혼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지 않고 한자니까 뜻으로만 풀이하는 어른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을 해서, 그 내용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버린 것이 적지 않다.
□ ‘사오기’로 잘 알려진 나무
세거리 부근에서는 섬개벚나무가 자주 눈에 띈다. 명찰을 달고 서 있는 나무만도 서너 개다. 그렇게 제주에는 유난히 벚나무 종류가 많다. 왕벚나무를 위시해서 벚나무, 올벚나무, 산벚나무, 산개벚나무 등이다. 이런 벚나무들은 보통 나무줄기에 가로로 줄이 그어지는 것이 특색이다. 하지만 수령이 많아지면 수피에 돌기가 생기고 구별이 잘 안 되기도 한다.
제주에서는 벚나무 종류의 목재를 ‘사오기’라 하여 비교적 단단하고 잘 닦으면 윤기가 흘러 건축이나, 가구재로 인기가 있다. 하지만 낮은 지역에 있는 벚나무 계통은 병충해가 심해 크게 자라지 못한다. 이 섬개벚나무는 보통 500〜1200고지에 분포하는 종이라 크게 자라서 목재로 많이 쓰였다. 보통 왕벚나무는 잎이 달걀형이나 섬개벚나무는 길쭉해 보이며, 특히 꽃이 다른 종보다 늦게 피는데, 총상꽃차례로 새끼손가락 같이 긴 덩어리에 30여 개 꽃이 촘촘히 달려있다.
□ 가을에 먹는 열매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이 숲길에서도 주위를 잘 살피면 먹을 만한 열매들이 있다. 우선 머리에 떠오른 것으로 ‘청산별곡’의 ‘머루랑 다래랑’이 생각나지만, 머루는 주로 햇볕이 잘 드는 벌판이나 골짜기 같은 곳에 자라기에 이 숲에서는 눈에 별로 띄지 않는다. 그런데 다래덩굴은 눈에 띄는 반면 나무 꼭대기에 오른 줄기를 아무리 살펴도 열매는 안 보인다. 익은 뒤엔 새들이 좋아하는 열매다. 으름덩굴도 가끔 눈에 뜨이나 열매가 달릴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
그래도 자주 눈에 띄는 건 산딸나무다. 하지만 이곳의 나무는 너무 커버려서 열매가 익었는지 설었는지도 잎새에 가려 잘 안 보이고 높아 딸 수도 없다. 과거 제주에서는 산딸나무 열매를 ‘틀’이라 하여 즐겨 따먹었다. 열매가 크기도 하려니와 수량도 많고 그만하면 당도도 높아 먹을 만하다. 제주속담에 ‘틀 타먹은 하르방 허대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틀 따먹은 정도를 가지고 대단한 걸 먹은 것처럼 수다 떠는 걸’ 꼬집는 말이다.
크기로 따지면 꾸지뽕나무 열매가 낫고 약효가 있다 하나 이는 나무가 커야 열리고 암수딴그루라 아무 나무에나 열리지 않는다. ‘볼레’라는 보리수나무 열매는 아직 여물지도 않았고, 이건 눈을 한두 번 맞은 다음이라야 부풀고 당도도 높아진다.
□ 사색하기 좋은 숲길
세거리에서 숲길이 끝나는 꽃나무 숲까지는 다니는 사람도 비교적 적고 길도 한적해서 사색하기에 알맞다. 금산방목지로 통하는 곳 억새밭에서 세지 않은 억새삘기(어욱삥이)를 한 줌 빼어들고 작은 언덕에 설치해놓은 간이의자에 앉아 고소하고 연한 삘기의 맛을 되새겨본다. 그래, 가을이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김현승 ‘가을의 기도’ 전문. <계속>
* 이 글은 뉴 제주일보 10월 6일자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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