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추사 유배길 1코스 - 집념의 길(1)

김창집 2021. 1. 17. 00:02

*모사본으로 전시중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격정의 시대를 거치면서 대정현성은 제주읍성, 정의현성과 달리 그 자취가 거의 사라져버려, 따로 떨어져 있는 대정향교를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전된 것이 없었다. 그 이후 1984년에 추사유배지가 복원되고, 20105월에 유배지 앞에 추사관(秋史館)’이 들어서면서 대내외로 널리 알려진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그러던 중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센터장 양진건 교수)에서 추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를 내걸고 3개의 답사코스를 개발하여 2011514일에 길을 열었다. 1코스 집념의 길, 2코스 인연의 길, 3코스 사색의 길로 명명된 길을 걸으면서 추사가 겪었던 유배생활을 추억하고, 그의 학문과 예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제1코스 집념의 길은 제주추사관 - 송죽사 터 - 1차 추사적거지 터 드레물 - 한남의숙 터 - 정난주 마리아 묘 - 남문지 못 단산과 방사탑 세미물 대정향교에서 다시 추사관으로 돌아오는 순환코스인데, 전체 8.6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 '세한도'의 집을 닮은 '추사관'

제주 추사관

 

  동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창고 같은 모습의 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작품이라고 한다. 창고처럼 밋밋하고 창()이 둥그런 모양은 세한도(歲寒圖)’에 나오는 집의 느낌이다. 유배의 땅에 세우는 박물관이란 걸 감안해 대부분의 전시실을 지하로 내린 과감한 구조라는데, 명예관장 유홍준은 이를 두고 욕망을 절제한 시도라 했다.

 

 입구에는 이제는 고인이 된 현중화 선생의 현판 글씨가 눈에 띈다. 전시실은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2019년 여름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던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淸朝文人)의 대화의 제주순회 전시 중이었다. 이번 전시는 추사 선생의 일생에 걸친 대표작 30여 점을 갖고 학예일치(學藝一致)’, ‘해동통유(海東通儒)’, ‘유희삼매(遊戲三昧)’ 등 세 가지 주제로 구성했다 한다.

 

  추사관은 기념 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부국문화재단과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한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일괄’,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 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 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니, 추사의 마지막 작품 版殿(판전)’ 편액과 대흥사의 無量壽閣(무량수각)’ 현판, 대정향교에 걸렸던 疑問堂(의문당)’ 현판, 그리고 이곳 유배지에서 완성했다는 국보 제180歲寒圖(세한도)’ 등의 모사본이 눈에 띈다.

 

  유물들이 거의 서예 작품들이라 전시실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지하1층에는 추사 작품 및 왕실문서, 추사 지인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지상1층은 추사영실추모 공간으로 임옥상의 작품 추사 흉상이 모셔져 있다.

 

*임옥상의 '추사흉상'

유허비에서 본 그의 일생

 

  이전에는 전시실을 나와 추사유허비를 거쳐 유배지로 가는 문이 열려 있었는데, 코로나19로 관람객을 통제하기 위해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유배지로 돌아 들어갔다.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친 집 대문으로 들어가 간단하나마 유허비에 나온 추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이곳은 근세조선 서도의 대가 김정희 선생이 유배되어 9년 동안이나 적거하셨던 유허지다. (중략) 헌종 6(1840) 101일 선생께서는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55세의 나이로 이곳 대정에 도착하셨다. 처음에는 송계순 집을 수년 후에는 강도순 집을 적소로 하여 헌종 14(1848) 126일 방면될 때까지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시고 많은 서화를 남기셨는데, 세한도도 이때의 작품이며 이른바 추사체를 여기서 완성하셨다. 제주를 떠나신 후 선생께서는 철종 2(1851) 7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함경도 북청에서 또 한 차례 귀양살이를 겪으시고 철종 7(1856) 10107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경학, 시문, 서도의 대가로 이 땅에 예술과 학문을 일으키신 그 위대한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

 

*추사 적거지

태풍이 할퀴고 간 초가지붕

 

  금년의 태풍은 서쪽으로 지나갔기 때문에 적거지의 지붕도 온전하지 못했다. 아직 집을 이는 띠()를 거둘 시기가 아니어서인지 망가진 지붕을 새끼줄과 그물 등으로 임시 묶어놓아 보는 사람으로서 불안하기 짝이 없다.

 

 대문 안 마당에는 초가집 3채가 마당을 향해 자리 잡았는데, 안채와 모커리, 밧거리(밖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안거리는 주인 강도순의 살림집이었고, 모커리는 추사가 머물렀으며, 밧거리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부대시설로 말방아, 돗통시, 눌굽 등을 마련해 놓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제주의 민속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원래 이곳 추사유배지에 있던 집들은 4.3때 불타버리고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한 것이라 한다.

 

*유배터의 눌

송죽사 터와 송계순 집터

 

  유배지에서 나오면서 왼쪽 길로 바로 1코스 유배길이 이어진다. 예전 막은골이라 부르던 이 골목 주변은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선생이 유배 와 살던 곳이다. 그로부터 200년 후에 이곳에 유배 온 추사의 건의로 유허비와 그를 기리는 송죽사가 세워졌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송죽사는 기단석 몇뿐이란다.

 

 송죽사 터에서 왼쪽으로 울창한 후박나무가 있는 골목길을 걸어 나오면, 이제는 사연도 희미해져버린 송계순 집터 안내판이 서 있다. 경계도 없이 북쪽 성벽까지 트인 밭가의 돌들만 어지러이 널려있다. 추사의 첫 번째 유배 터라고 하는데, 다음엔 어디로 가라는 방향표지도 없이 나그네를 당황케 한다. <계속>

 

                           *이 글은 필자가 '뉴제주일보'(2020년 11월 10일자)에 썼던 글입니다.

 

*추사유배길 출발점의 추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