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추사 유배길 1코스 - 집념의 길(2)

김창집 2021. 1. 26. 11:17

대정우물 터인 두레물을 찾아서

 

  송계순 집터에선 어디로 가라는 표지도 없이 길이 두 갈래로 나 있다. 타지 사람들인 경우 동서남북 방향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참 난감할 것 같다. 한 번 길을 내고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마을사람들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남문 쪽에 우물터가 있다는 걸 출발지점 게시판에서 확인한 상태여서 남쪽으로 나오니, 추사로 네거리다. 우물터는 1990년대 초 삼의사비가 있을 때 한 번 와 보고, 추사 유배길 개통식 때도 왔었지만 기억이 잘 안 난다. 다행히 동쪽 골목길 진입로에 안내 표지가 있어 시행착오를 한 번 거친 끝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전에 커다란 못 구멍 주위에 풀만 무성했던 샘은 새로 정비를 해서 돌을 깎아 계단을 만들고 물허벅 소녀상도 세워놓았다. 본시 이 못은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이라는 데서 두레물이라 불리던 옛날 대정골의 유일한 우물로, 당시 유력한 명관이 추대되면 물이 말랐다가도 용출하고 만약에 그렇지 못한 이가 추대되면 용출되던 물이라도 금세 말라버렸다고 쓴 안내판이 서 있다. 지금 잡풀은 무성하지만 명관이 왔는지 물이 흥건하다.

 

동계 정온 유허비

 

  우물터에서 골목길을 돌아 나오니 오른쪽으로 보성초등학교가 보이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도담터에 동계 정선생 유허비(桐溪鄭先生遺墟碑)가 나타난다. 이 비는 1842(헌종 8)에 추사 김정희의 건의로 제주목사 이원조가 동계 정온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유배와 살았던 막은 골에 세웠던 것인데, 동문 성 밖으로 옮겼다가 1963년에 보성초등학교로, 197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동계 선생은 1614(광해군 6)에 영창대군을 처형하게 한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참형과 폐모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 대정현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적거 생활을 한 후, 1623(인조 1) 인조반정으로 방면된 인물이다.

 

 동계 선생은 유배 생활 중에 덕변록(德辨錄)’을 편집해 자성서로 삼았고, ‘망백운가(望白雲歌)’, ‘망북두시(望北斗詩)’ 등을 지어 우국충정을 노래했다. 그는 김정, 송시열, 김상헌, 송인수와 함께 제주 교학 발전에 공헌한 제주 오현(五賢) 중의 한 분이며, 1668(헌종 9)에 오현단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되었다.

 

한남의숙 터

 

  서문 앞 왼쪽에 모아 세운 4기의 돌하르방의 배웅을 받으며 한남의숙(漢南義塾) 터를 찾아간다. 한남의숙 터를 유배길의 코스로 선택한 건 아무래도 추사의 두 번째 적거지 주인이었던 강도순의 증손자인 강문석(姜文錫)이 설립한 의숙 터였던 때문인 것 같다. 강도순과 그의 형제들은 추사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강문석은 1925년 이곳에 한남의숙을 설립한 후, 모슬포청년회 회장으로 민중계몽운동을 별였다. 당시 한남의숙은 산남의 3대 의숙의 하나로 꼽혔는데, 민족운동 혐의로 1928년 일제탄압에 의해 폐교되었다.

 

 장소가 애매한 가운데 의숙 터로 보이는 조그만 집터 입구에는 또 하나의 비()가 나란히 섰다. 들여다보니, 대정지서 옛터 추모비로 43 당시 보초를 서던 경찰 1명이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520일 밤 9연대를 탈영한 부대원들이 기습해 경찰관을 살해하고 대정지서로 사용하던 대정향사를 불태워버린 장소라고 덧붙였다.

 

마리아 묘로 가는 길

 

  43은 도민들의 가슴에 이래저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진행되고 있는 개정안이 연내에 조속히 통과되기를 기원하며 발길을 옮긴다.

 

 곧게 뻗은 도로를 걸다가 당시 추사가 이곳을 걸어 진짜로 정난주 마리아 묘를 찾았을까궁금증이 인다. 마리아 묘의 안내 글에는 추사는 평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아들인 정학연(丁學淵), 정악유(丁學游)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큰형이었던 정약현의 딸인 정명연(정난주의 본명)에 대해서도 소식은 잘 알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 서간문 같은 곳에 언급하지 않는 건 민감한 종교 문제 때문이었을까?

 

 보성리 붕우룻이라는 못에 철새 몇 마리 앉았다가 인기척에 놀란 듯 저쪽으로 헤엄쳐 가버린다. 오른쪽으로 한라산이 의젓하게 나타나고, 이 지역 특산인 마늘 밭에서 일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답게 다가온다. 급수 탱크 위에 그려 놓은 농가 모습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왼쪽길로 꺾어 들어가 올레길 11코스와 만났다.

 

정난주 마리아 묘

 

  유배길은 천주교 순례길과 대정성지에서부터 나란히 이어진다. 천주교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란 제목의 무덤 옆 묘비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 신심을 증거한 정 마리아는,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던 당대 최고의 철학자 약전, 약종, 약용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檗)의 누이였다. 황사영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황사영은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순교했고, 어머니는 거제도, 정 마리아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에 귀양 가게 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라 추자에서 아들과 생이별을 하였다.

 

 제주목 대정현에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내며 그침 없는 순교적 행위로 신고에 찬 삶을 살다가 1838년에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계속>

 

*무덤 입구에 세운 정난주 마리아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