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마리아 묘를 나서서
묘역을 나서면 오른쪽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상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성모님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가서 보면 한복을 차려 입었고 안은 아기는 살포시 엄마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엄마는 이제 곧 두 살 난 아들을 섬에 그냥 두고 가야 할 걸 걱정하는 수심 가득한 얼굴이다.
호송선이 잠시 추자섬 예초리에 머물자 정난주 마리아는 아들을 저고리로 싼 후 이름과 출생일을 적어 황새바위에 숨겼고, 다행히 아들 황경헌은 어부 오씨(吳氏)에 의해 구조되어 한 집안 사람으로 자라나 후손들은 지금도 하추자에 살고 있다. 여인상 아래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 새긴 글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정고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네거리에서 잠시 걷던 올레길 11코스와 작별하고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한참 걸어 나오면 일주서로(1132)가 나타난다. 마늘 농사도 이젠 사양길에 접어들었는지 밭에서 브로콜리도 가끔 보이고 태양열 발전기로 가득한 곳도 있다. 마을 가까운 곳에는 감귤이 더러 남아 있고, 한라봉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 남문지 못의 풍경
일주서로를 건너면 눈앞에 바로 ‘남문앞물’이다. 연못은 자연석으로 둘레를 쌓아 잔디밭을 조성했는데, 주변에 버드나무와 담팔수 등을 심고 못 가운데 정자를 세운 뒤, 나그네들을 위해 양쪽에 쉼터를 마련했다.
‘남문 축성작업이 한창일 때, 지나가는 노승이 사방을 살피더니 감독에게 그대로 축성작업을 계속하면 백성들이 피해가 많겠다는 말을 남기고 길을 재촉했다. 현감이 그 노승을 모셔다 연유를 물으니, 서남쪽에 있는 모슬봉이 화기가 비쳐 남문 앞에 못을 파 화기를 누르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하자, 못을 판 후 축성을 했는데 공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 재앙 없이 완공되었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는 연못이다.’라고 해설판에 썼다.
못 앞에 세운 것은 소치 허련(小癡 許鍊)이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阮堂先生 海天一笠像)’이다. 세운지 몇 년이 안 되었는데도 희미하게 탈색되어 간다.
□ 방사탑 - 인성리 거욱 1, 2호
알벵디를 바라보며 단산 쪽으로 걷다보면 2기의 거욱대가 오른편에 조금 거리를 두고 나타난다. 요즘에는 거욱대를 흔히 방사탑(防邪塔)이라 일컫는데, 사실 제주에서는 ‘가마귀․가마귓동산․거욱대․고장섬․답․돌코넹이․돌탑․액탑․오다리탑’ 등 지역마다 자기들 나름의 이름으로 친숙하게 불렀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는 학술용어로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를 중시했다. 설령 마을 어느 방위 쪽이 휑하게 트이든지 보기 싫고 사악(邪惡)한 기운이 비치면, 그 기운이 뻗치는 것을 막으려고 중의를 모아 이런 형태의 것들을 세웠다. 허(虛)한 곳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동쪽에 위치한 인성리 방사탑 1호는 높이 225cm, 지름 230m의 원뿔형으로 ‘이곳 알벵디 쪽이 허하여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고, 가축이 병들어 죽어가자 4기를 세운 후로 그러한 현상이 사라졌다.’고 해설판에 써 놓았다.
꼭대기 마감부에는 돌을 깎아 사람 형상을 만들어 세웠는데, 제주도 민속자료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거기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방사탑 2호가 서 있는데, 거의 같은 형식이다. 원래 4기였으나, 속칭 ‘개죽은 물’과 ‘머논’의 것은 중간에 훼손되었다고 한다.
□ 단산과 세미물
방사탑에서 나오면 눈앞에 길게 뻗어있는 오름, 바로 ‘단산(簞山)’이다. 속칭 ‘바굼지오름’으로 오름의 소재지 마을인 사계리에선 바굼지(바구니의 제주말)처럼 보인다. 일부 학자 중에는 ‘오름이 박쥐가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하여, ‘박쥐’의 아이누어인 ‘바구미’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표고 158m, 둘레 2566m의 단산은 응회구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침식에 의해 분화구의 일부만 남아 있다. 바위봉우리가 중첩된 북사면은 수직의 벼랑을 이루며 남사면은 다소 가팔라 보인다.
길을 가다 보면 오름과 오름 사이가 끊긴 것처럼 보이는데, 오른쪽으로 길게 뻗친 것은 또 다른 화산체인 금산(琴山)이다. 오름과 오름 사이로 길을 낸 것은 가뭄이 들었을 때 대정고을 사람들이 대정향교 옆에 자리한 ‘세미물’을 길러 다니며 낸 길이라 한다. 세미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고 수량이 풍부하다는 샘이다.
□ 대정향교와 추사 편액
대정향교는 1420년(세종 2)에 처음 대정성 북쪽에 지었었는데, 성 안에서 여러 차례 옮기다가 1653년(효종 4)에야 비로소 이 자리 단산 앞에 지어졌다. 경내에는 남쪽에 명륜당이 북향하여 자리 잡았고, 그 맞은편에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삼문이 있는데, 그 문 안에 대성전이 명륜당을 마주보고 서 있다.
동쪽에서 대정향교를 바라보면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전하는 말로는 1811년(순조 31) 훈장 강사공(姜師孔)이 삼강오륜을 상징하여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대성전 뜰에 심었었는데, 지금 그때 것은 세 그루만 남아 있다.
동재(東齋)에는 추사가 썼다는 ‘의문당(疑問堂)’ 현판이 걸려 있는데, 진품 편액은 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의문당 현판 뒷면에 적힌 것을 보면, ‘도광 26년(1846) 11월에 본관이 진주인 강사공이 적소에 있는 참판 김정희에게 액자 글씨를 청해 받아 향원(鄕員) 오재복(吳在福)이 공자탄신 2479년(무진년) 봄에 걸었다.’는 내용이다. <끝>
*뉴제주일보에 연재되었던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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