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대로 삿갓 하나 들고 인연 따라 오가니(天風一笠亦隨緣)’는 추사 유배길 2코스 ‘인연의 길’ 표제어이다. 그리고 소개 글로 ‘수십 편의 시를 쓰고, 무수한 편지를 식구와 지인들에게 보내고, 귤이나 꽃에 대해서도 남다른 호기심을 표현하는가 하면, 특히 차를 통해 여러 지인들과 우정을 나누던 추사의 귀양살이 일상과 취미를 들여다보는 길’이란 해설을 덧붙였다.
‘인연의 길’로 명명된 2코스는 제주 추사관을 출발, 수월이못을 거쳐 추사와 감귤 → 제주옹기박물관 → 매화마을 → 승마장 → 오설록에 이르는 8km의 길로, 걷는데 3시간 정도 소요된다.
□ 수선화를 좋아했던 추사
2코스 출발점은 동문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성담 밖이다. 성 굽에는 수선화가 심어져 있어 이른 것은 하나둘 벌써 꽃이 벌기 시작했다. 원래 제주수선화는 꽃술이 퇴화되어 노란 잎으로 변한 것이다.
제주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생종 제주수선화뿐이었는데, 이후 원예업자들이 ‘금잔옥대(金盞玉臺)’라는 노랗고 둥근 꽃술이 있는 것을 들여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길섶에도 퍼져 섞여 핀 곳이 많다. 뿐만 아니라 노랑수선이나 대형 나팔수선까지 들여 놓았다.
수선화를 좋아하는 추사가 제주에 와보니, 사방에 널려있어 귀한 줄 모르고 박대하는 것을 보고, ‘하나의 사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인다.’며, 은근히 자신의 처지에 비교해 가까이서 시도 짓고 그림도 그렸다. 소나 말에게 먹인다고도 했는데, 수선화가 독이 있어 못 먹고 박접 받는 줄은 몰랐던 것 같다.
□ ‘수월이못’에서
동문에서 성담을 끼고 북쪽 방향의 추사로 38번길을 900m쯤 걸으면 왼쪽에 ‘수월이못’이 나타난다. 입구에 세운 표지석에는 ‘대정현이 설치되면서 이곳에 수월이라는 관기가 살았는데, 성질이 온순하지 못하여 관가에 고자질하며 인근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녀가 죽자 주민들이 몰려들어 집터를 파헤쳐 연못을 만들고 수월이못이라 했다.’고 새겼다.
들머리에 근래 들어 정자를 세웠고, 큰못에는 부들 같은 물풀들이 자라났는데, 나머지는 잡풀로 가득하다. 붕어가 많아 낚시터로도 알려졌다는 못 남쪽에는 작은 철새들이 모여 부지런히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공터에는 둥그스름한 바위에 추사의 시들을 새겨 곳곳에 심었다. 그 중에 ‘수선화부(水仙花賦)’를 본다. ‘연못에 얼음 얼고 뜨락에 눈 쌓일 무렵/ 모든 화초가 말라도 너는 선화처럼 향기를 발산하여/ 옥반의 정결을 펼치고 금옥의 아리따움을 간직한다/ 꽃망울 노랗게 터지고 조밀한 잎 파릇이 피어나면/ 고운 바탕엔 황금이 어리네’
□ 추사와 귤
추사길 곳곳에는 지금 감귤이 넘쳐난다. 12월말이 되었지만 아직 반도 수확을 못한 채 밭에 그냥 남아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 들리는 말로는 코로나19 탓으로 소비가 안 되어 가격이 너무 낮은 반면, 타 지역 일꾼들도 오지 않아 일손을 구하기 어렵고, 품삯을 제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추사가 제주에서 지낼 무렵에는 지금의 품종과는 다른 감귤들이었고, 또 아무 곳에서나 재배하지 않았을 때였다. 따뜻한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감귤을 생산해 진상해야 했던 시절, 민폐를 없앤다고 각관(各官)에서 과수원을 설치하여 진상에 대비하라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어서, 진상한다고 핑계하여 나무의 수를 세어 장부에 올리고, 겨우 열매가 맺으면 숫자를 헤아려 빼앗아 가니, 집에 있는 나무조차 몰래 죽여 후환을 없앨 때였다.
* 창고 벽의 '애호' 글씨
추사가 귤향을 좋아해서 기거하는 곳을 ‘귤중옥(橘中屋)’이라 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군자향(君子香)’하여 가까이 하였다. 그런데 ‘추사와 감귤’이란 안내판이 세워진 길 맞은편 창고 벽에 ‘애호(艾虎)’라는 글씨를 크게 써놓은 것에 대한 해설이 없어 안타깝다.
* 구억마을 돌담에 놓인 화분
□ 제주옹기마을 ‘구억리’
그곳을 지나 1km 정도 걸으면 중산간서로가 나타나고 바로 ‘제주옹기마을 구억리’다. 아니나 다를까, 거리 양쪽 돌담을 적당한 높이로 쌓고 거기에다 굽다 찌그러진 옹기와 깨어진 것 등을 올려놓고 꽃을 심었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꽃이 더러 말랐지만 참 독특하다.
과거 이 마을에서 옹기를 많이 구웠고 아직 가마가 남아 있는 것에 착안하여, 마을에서는 그 전통을 지켜나가자고 ‘옹기체험관’을 만들어 기술을 전수시키고 있다. 추사길은 원래 이 마을에 있는 ‘제주옹기박물관’을 거치도록 되어 있지만, 그 박물관은 무릉리로 옮겨가 버리고 이곳 옹기전시관은 리모델링 중이라 내년에 완공시켜 옹기를 전시한다고 했다.
*노랑굴
□ 노랑굴과 검은굴
카페를 나와 영어교육도시로 이어진 길을 걷는다. 도시형 건물이 이어지고, 한창 건설 중인 빌딩도 있다. 이름도 빌라, 에디움, 힐 등이고, ‘국제’라는 말이 보편화 되었다. 구억리 노랑굴은 바로 이 길 글로벌에듀로 정류소 바로 안에 있다.
구억리 노랑굴은 도지정 기념물 제58-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검은굴과 달리 가마의 흙이 흘러내릴까봐 지붕을 덮었다. 이곳은 섬주민들의 생활용기를 구워내던 대표적인 ‘노랑굴’의 하나다. ‘노랑굴’은 구워낸 그릇 표면이 노란색을 띠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검은 빛을 띠면 ‘검은굴’로 부른다.
검은굴은 그곳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도지정 기념물 제58-2호인 구억리 검은굴은 기와처럼 검은 시루와 항아리, 허벅 등을 구워내던 돌가마다. 옹기가 구워질 때 산화과정에서 연기를 그릇에 입힘으로써 검은 빛을 띠게 되는 것이다. <계속>
* 이 글은 필자가 뉴제주일보 2020년 12월29일자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검은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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