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4․3길로 떠나면서
이제 곧 4월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는 그의 시 ‘황무지(荒蕪地)’ 첫 연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어/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고 읊었다. 그런데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 한 것은 우연히도 우리 제주민이 겪었던 4․3을 두고 한 말 같다.
하지만 70여 년 동안 메마른 환경에서 고통을 주었던 4․3은 올 들어 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생존 및 행방불명 수형인 다수가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해결의 장이 열릴 기미를 보인다. 그래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51번 버스를 타고 동광으로 가면서도 여느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흑역사(黑歷史)도 역사다. 이번에는 공포에 떨면서 밤에 몰래 걸었던 길, 숨었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던 굴, 멀리 숨어서 타들어가는 걸 애타게 지켜보았던 집터들을 돌아보며 아픔을 같이 나누어 보기로 한다.
□ 안덕면 동광마을 4․3길
안덕면 중산간 마을인 동광리는 곶자왈이 주변에 많아 농토가 적었기 때문에 밭을 중심으로 동네가 여기저기 나뉘어져 있었다. 4․3 당시만 해도 무등이왓 130여 호, 조수궤 10여 호, 사장밧 3호, 간장리 10여 호, 삼밧구석(마전동) 45호 등 200여 호나 되는 마을이었다.
출발지점인 동광리 복지회관 안내판에 나온 대로, 이 마을은 조선 말기 부패한 관리들이 수탈로 원성이 자자하던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곶자왈로 인해 비교적 농토가 적었던 마을이라 대부분 화전을 일구어 경작하였는데, 화전세(火田稅) 과다징수에 반기를 들어 임술년 제주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미군정 하 4.3 직전에도 일제와 다름없는 공출에 불만을 품고, 마침 보리수매 독려 차 마을을 방문해 이장 댁에 머물고 있던 공무원들을 상대로 할당량 조정을 요구하다가 언쟁 끝에 마을 청년들과 충돌해, 그 여파로 미군정 당국에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4․3사건의 와중인 1948년 11월 21일에 무등이왓이 전소되었고, 무등이왓에서 약 100명, 삼밭구석에서 약 50명, 조수궤에서 6명이 희생되었다.’고 썼다.
□ ᄆᆞᆯ방에와 동광분교 터
출발점인 동광복지회관은 동광6거리와 동광리 사이에 있다. 1코스는 회관에서 ᄆᆞᆯ방에 – 동광분교 – 삼밭구석마을 터 – 임씨 올레 – 4․희생자 위령비 – 잃어버린 마을 표석 – 큰넓궤 – 도엣궤까지 돌아오는 6km 길인데, 왕복 2시간이 걸린다.
ᄆᆞᆯ방에는 마을버스 정류소 뒤 쉼터에 옮겨 놓았다. 원래 무등이왓에 있던 것으로 1960년대 초반에 두 차례 옮긴 후에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며, 안내판에는 방아의 역사와 기능 같은 것을 써놓았다. 관리를 안 하는지 혹에 물이 흥건히 고였다.
‘서광초등학교 동광분교장이 있었던 이곳, 오랫동안 배움의 불을 밝혔던 자리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웁니다. -배움의 옛터’란 표지석이 서 있는 분교 터에 2011년 7월 18일 서귀포시 교육지원청 교육장의 이름으로 세운 사연이 안타깝다.
1948년 당시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진 동광분교는 이듬해 1월에 폐교되었다. 이후 동광분교는 1949년 3월 안덕초등학교에 흡수되었는데, 4․3당시 학급수는 1개 학년 1학급씩(30명) 4학년까지 4개 학급으로 총 12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소실 전 학교의 규모는 3500평 부지에 목조기와 교실, 관사, 화장실, 물탱크, 운동장 및 1500평 정도의 실습지도 갖고 있었다. 지금 교문기둥에는 ‘동광녹색 농촌체험마을 방문자 센터’란 간판이 붙었다.
마을 안내판의 소개를 보면, ‘360여 년 전 만주군(만주골) 일대에 임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뒤, 삼밭구석으로 분산 이주하여 마을이 두 곳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그러다 4․3때 마을이 완전 소실되어 살아남은 주민들이 해변마을로 소개됨으로써 폐허가 되었으나, 1953년경부터 정부의 재건정책에 힘입어 서광동리에 재건본부를 두고 마을이 복구되어, 지금은 무동동과 마전동에만 주민들이 거주한다.
□ 삼밭구석마을과 임씨올레
마을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난 길을 5분 정도 걸으면 신화역사로와 마주친다. 그곳 건널목을 지나 전기차충전소 옆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삼밭구석 입구가 나오며, 왼쪽으로 돌아 나올 때까지가 옛 마을 터이다. 더러 새 건물이 들어서고 집터 둘레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삼밭구석’이라 이름 붙은 마을 표지석에는 ‘3백여 년 전 설촌된 이후 50여 호에 1백5십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평화롭게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마을 이름은 삼[麻]을 재배하던 마을이라 하여 마전동(麻田洞)으로 지어졌다 한다.’라고 새겼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이라고 비켜가지 않았으니,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방화된 후 주민들은 마을 부근 속칭 ‘큰넓궤’라는 굴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영실 부근 볼레오름까지 피신하였다. 그 와중에 50여 명의 주민이 마을 안 또는 서귀포 정방폭포 등지에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간장리(동광리)에 성을 쌓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 마을은 재건되지 않았다.
'임씨 올레’ 안에는 다섯 가구가 살았다. 토벌대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웃이 한 식구처럼 수눌며 농사를 짓고 식께, 멩질까지 같이 먹으며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4․3때 임문숙씨 가족 5명과 함께 총 14명이 희생되었다. 지금 사람이 살지 않은 집으로 난 긴 올레에는 나뭇가지나 가시 같은 것을 쌓아 놓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계속>
*이 글은 지난 3월 30일(화요일) 자 뉴제주일보에 연재했던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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