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희생자 위령비
삼밭구석의 중심이었던 마을공터인 동광리 1425-1번지에는 수령 약 500년을 헤아리는 보호수 팽나무가 한 그루 있다. 서 있기 보다는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다섯 개의 받침에 의해 떠받혀 있다. 마을을 태울 때 화상을 입었는지 줄기에 시멘트로 때운 상처가 애처롭다. 죽다가 살아남아 4․3의 상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보호수 옆에는 1999년 4월, 동광리 추진위원 대표 김여수(金麗洙)의 명의로 세운 ‘4․3사건 위령비’가 서 있다. 앞면에 ‘서기 1948년 사삼사건의 슬픈 사연을 통곡의 소리로 새겨 놓습니다. (중략) 마전동(麻田洞)은 삼을 많이 재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3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50여 가구가 평화롭게 한 집안처럼 목축과 밭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생활해 왔는데, 4․3사건이 발생하며 마을에 모든 가옥은 불타 없어졌고, 주민 일부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며, 나머지 주민들은 뿔뿔이 헤어져 삶에 온갖 역경을 겪었다. 4․3사건 전만해도 순진하고 천박했던 중산간 마을 이곳 사람들은 고향을 빼앗긴 서러움과 너무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의 슬픈 통곡소리를 먼 훗날 후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이 사연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라 새기고, 뒷면에 당시 희생된 55인의 이름을 올렸다.
□ 동광리 사건을 영화화한 ‘지슬’
마을을 걸어 나오면서 주변 밭을 바라보니 삼[麻]을 심은 흔적은 없고, 너른 밭에 보리이삭이 패어 봄바람에 물결친다. 큰길로 나와 신화역사공원이 있는 방향으로 걸으며,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의 장면을 떠올린다.
2013년에 개봉된 ‘지슬’은 4․3때 이곳 동광리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2012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후, 평단과 관객 모두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넷팩상,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 무비꼴라쥬상을 받으며 국내외로 알려지더니, 미국의 선댄스영화제와 프랑스의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는 소멸 위기에 처한 제주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표준어 자막을 내보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 4․3사건의 전말을 알리기보다는 무자년 11월에 제주섬 사람들이 ‘해안선 5km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여긴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 삼삼오오 피난길에 올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산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감자를 먹으면서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걸로 보면 당시 주민들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끔찍한 비극을 겪은 셈이다.
□ 주민들이 은신했던 큰넓궤
신화역사로에서 큰넓궤로 가는 진입로에는 ‘4․3 유적지’임을 알리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고, 거리는 1.3km인데 넓은 밭 사이로 난 길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도너리오름 주변에는 오름에서 흘러나온 용암과 쇄설물이 쌓이며 이루어진 크고 작은 굴과 곶자왈 같은 지형이 많다. 요즘에는 개간이 되어 주변이 트여 있지만 4․3 당시만 해도 곶자왈에 숲이 우거져 있어 피신할 굴이 있다는 것은 주민 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진입로로 계속 가다 보면 다시 안내판이 나오고 안에 유적지 시설물이 보인다. ‘궤’는 제주어로 ‘바위굴’ 즉, ‘암반으로 굴이 형성되어 비나 바람을 피할 정도로 크고 깊게 형성된 굴’을 말한다. 안내판에 ‘큰넓궤’는 제주4․3 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은신했던 곳이라 썼다.
1948년 11월 중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들은 급히 야산으로 숨어 있다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곳은 험한 대신 속이 넓었고 사람들이 숨어살기에 편해 당시 어린이나 노인들이 일시 거주했고, 청년들은 주변 야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에 분산돼 있으면서 토벌대를 망보거나 식량과 물을 조달했다.
그러나 이 굴속에 지낸지 40여 일이 지나면서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고 말았다. 토벌대가 좁은 굴속으로 들어오려 하자 주민들은 이불솜 같은 것에 불을 붙여 매캐한 연기를 내보냈는데, 토벌대는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안에다 대고 총만 난사하다가 철수했다. 주민들은 그 틈을 이용해 굴을 나와 한라산 방향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그러나 뒤쫓아 온 토벌대의 총에 맞아 볼레오름과 영실 주변에서 사살되거나 붙잡혀 정방폭포 등지에서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
□ 문화재청의 보호를 받는 도엣궤
‘도엣궤’는 ‘큰넓궤’ 안쪽 약 50m 지점에 자리 잡았다. 원래 큰넓궤와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며, 역시 4․3 당시 주민들이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다. 동굴 바닥에는 피난 당시 생활도구와 그릇의 파편이 널려 있어 ‘지슬’의 촬영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동굴은 2003년에 문화재청에서 조사한 결과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도너리굴’이란 이름으로 보존 관리하고 있다. 동굴 내부에는 용암종유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용암폭포를 비롯해 용암주석, 분기공, 아아용암, 용암롤, 동굴산호 등이 관찰되는가 하면 특히 가지굴이 잘 발달된 굴이다.
나오는 길에 큰넓궤 입구에 새겨놓은 강덕환 시인의 시구를 보며, 당시 학교도 못 가고 굴속에 숨어 가슴 조였을 아이들이 생각나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도 잡아가부난/ 학굔 댕겨짐이랑 말앙/ 집도 문짝 케와부난/ 경해도 살아보잰/ 불치 베르싼/ 감져 두 개 봉가 먹언/ 굴 소곱에 간 곱안 이서났주게’ -강덕환 ‘나의 살던 고향은’ 중에서 <계속>
* 이글은 뉴제주일보 4월13일자에 연재했던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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