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문숙 일가 헛묘
동광마을 4․3길은 1, 2코스 모두 동광리 복지회관을 시작점과 종착점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처럼 상주하는 안내자는 없다. 밖에 걸린 안내도만 보면 그냥 무난하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2코스는 헛묘를 거쳐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을 돌아보고, 안덕면 충혼묘지를 지나 원물오름에 올라갔다 돌아오는 노정(路程)이다.
헛묘는 복지회관에서 나와 동광육거리에 이르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밭 하나 건너 한 산담 안에 3기와 4기를 구분지어 모두 7기의 봉분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두 봉분이 합묘(合墓)여서 모두 아홉 분의 영혼을 모신 셈이다. 가운데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고, 그 왼쪽에 ‘헛묘’라는 이름으로 안내판을 세웠다. 안내판에는 ‘이곳 7기의 묘(2기는 합장)는 이 마을 출신 임문숙 일가 9명의 영혼이 모셔져 있는 헛묘다. 헛묘는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때 영혼을 모시고, 생전에 입던 옷이나 물건 등을 넣어 만든 분묘이다.’라 쓰고 그 사연을 아래에 적었다.
동광리는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8년 11월 21일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 군인들에 의해 방화됐다.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오는 즉시 눈에 띄는 주민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해 사살했고, 숨어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군인들을 피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큰넓궤’로 피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 역시 발각 되었고, 주민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20여km 떨어진 한라산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곧바로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을 따라 쫓아온 군인들에 의해 거의 다 붙잡혔다. 체포된 사람들은 서귀포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인 1949년 1월 22일 정방폭포에서 학살됐다.
동광리 주민 40여 명의 유해를 두고, 유족들은 피해를 볼까 두려워 정방폭포 아래 바닷가에 방치된 채로 수습을 못하다가 1년 후 감시를 어느 정도 푼 뒤에야 시체를 찾았으나 허사였고, 일부 유족들이 당시 그곳에서 숨진 가족들의 혼을 불러내어 이곳으로 모셔다 ‘헛묘’를 만들었다.
□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밟히다 살아남은 할미꽃 허옇게 센 이삭의 애처로운 배웅을 받으며, 동광육거리를 지나 한라산이 환히 바라다 보이는 길로 들어섰다. 동광 양잠단지로 가는 신화역사로다. 얼마 안 가 평화로 굴다리 아래를 지났는데, 오른쪽으로 IUCN기념숲이 나타난다. 이곳에 급 조성된 그리 크지 않은 이 숲은 2012년 세계자연보전총회 제주 개최(2012. 9. 6.~9. 15)를 기념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건강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마련된 숲이라 한다.
거기서 얼마 안 가 석교동 버스정류소가 있고, 곧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표지석이 나온다. 표지석 옆 전신주를 의지해서 옅은 초록색 안내판이 서있는데, 내용은 ‘무등이왓 마을소개’다.
‘무등이왓은 동광리 5개 부락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 130여 호가 있었다. 국영목장인 7소장이 있어 말총을 쉽게 구할 수가 있고,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주산지였다. (중략) 지금은 사라진 초가집 울담 따라 아직도 대나무가 많아 오순도순 살았던 당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정경이 그려진다.’
□ 무등이왓으로 가는 길
길 양쪽 대나무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노란 유채꽃과 보라색이 섞인 하얀 갯무꽃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으로 바로 걸어 들어간다. 지금 우리 제주섬 중산간마을을 다니다 보면 제주어로 ‘족대’라 부르는 대나무(이대)가 자주 보인다. 이는 대나무 뿌리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번식력이 왕성한 때문이다. 집은 불타 없어져도 대나무는 살아남아 옛날 이곳이 집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초가를 짓고 살 때 대나무는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존재였다. 집터의 허술한 곳을 둘러 바람막이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집을 지을 때 방과 방 사이, 또 천정에 이런 대나무를 엮어 그 위에 흙을 발랐고, 지붕 서까래 위에도 대나무를 엮어 깐 뒤 띠로 덮었다. 세간살이 중 애기구덕을 비롯한 각종 바구니와 차롱(채롱)을 만드는데도 사용되었고, 그리고 각종 농기구에서 어로도구까지 안 쓰이는 데가 없었다.
입구에서 200m쯤 진입하면 길이 왼쪽으로 구부러지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입구를 터놓은 넓은 밭이 ‘최초 학살터’다. 원래는 강귀봉 씨의 우영팟이였다고 말하는데, 집이 불타는 바람에 지금은 터를 정리하여 넓은 밭이 되어 있다.
□ 그날의 최초 학살터
1948년 11월 15일 새벽, 이곳 마을을 포위한 군 토벌대가 연설을 하겠다며 주민들을 집결시켰는데, 젊은이들은 이미 피해버린 터라 노약자들만 모여들었다. 토벌대는 주민들이 집결하자마자 다짜고짜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다가 10여 명을 총살시켰다. 이 사건은 이후 참혹하게 전개된 제주 중산간지역 초토화 작전의 첫 신호탄이었다. (제민일보 취재반 ‘4․3은 말한다’ 5권 251쪽, 전예원)
당시 마을 젊은이들이 마을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1년 전인 1947년 여름, 보리공출 왔던 면직원들을 구타한 사건을 빌미로 4․3사건 이후 당국의 지목을 받아 숨어 다녔기 때문이다. 이 일이 이루어질 당시 동광리는 소개령이 내려지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은 노약자들까지도 산으로 내몰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중 대부분은 큰넓궤로 피했고, 이후 주민들은 지난 글에 나왔던 것처럼 비참한 결과를 맞았다. <계속>
*이 글은 뉴제주일보 2021년 4월 27일자(12면 기획기사)에 필자가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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