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제주 안덕 동광마을 4․3길 2코스(완)

김창집 2021. 5. 18. 00:32

옛 공고판과 광신사숙 터

 

  최초 학살 터 조금 지나서 맞은편에 옛 공고판과 광신사숙 터가 이웃해 있다. 옛날 이곳은 7소장에 소속된 목장지역이었다.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2) 같은 외세와의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서 신무기에 대항해 말의 쓸모가 현격히 떨어졌는지 말 목장에 대한 관심이 덜해졌고, 이곳에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지금 집터만 해도 꽤 넓은 면적이고 주변에 많은 밭을 일구었다. 43 당시만 해도 130호 가량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꽤 큰 마을이었으며, 철종 때 농민들의 수탈에 분개해 일어난 제주민란(1862) 2차 봉기 때 앞장섰던 강제검(姜悌儉)도 이곳 출신이다. 그런 때문인지 교육에 대한 열의가 강해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광신사숙이 설립 운영되었고, 이후 1939년에 2년제 동광간이학교가 세워져 인근 산간마을 학동들까지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의 지도와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 1966)’에 이 마을 이름이 무동전(舞童田)’이라 했고, 170여 년 전 한 풍수사가 보고 이곳 지형지세가 춤을 추는 어린아이를 닮았다.’는 데서 무동이왓이라 했다는 마을소개 글이 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냥 떠도는 민간어원설인 것 같다. 아무튼 당시 이 자리가 마을의 중심으로 주목을 받는 자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ᄆᆞᆯ방에 터를 거쳐 잠복학살 터로

 

  당시 무등이왓에는 총 다섯 개의 ᄆᆞᆯ방에가 있었다 한다. 그 중 동광리로 옮겼다는 방에터를 지나 잠복학살 터로 향했다. 잠복 학살터는 조금 높은 동산의 팽나무 아래 자리해 있는데, 나무는 그날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송악을 몸에 잔뜩 걸친 채 지친 듯이 서 있다.

 

  토벌대는 19481211일에 자신들이 학살한 마을 사람들 숫자가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이튿날인 12일에 친인척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으로 예상하고 이곳에 잠복해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김두백 씨와 일가족 10여 명이 나타나자 일행을 붙잡아 한쪽으로 몰아다 짚더미와 방석 등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울부짖는 고통 속에 화염에 휩싸여 죽어간 이들은 대다수 여성, 노인, 어린아이들이었다.

 

  ‘누가 카인의 증표를 그 손에 쥐어주었나/ 총부리 겨누고 방아쇠 당기고 사람들 등에 잉걸불 던졌던 사람들/ 이름 한 자 적혀 있지 않은 몰자비(沒字碑). / 겨울 하늘에 새겨진 아이들 이름 한 자 적혀 있지 않은/ 몰자비 위로 귀향하듯 닻을 내리는/ 동짓달 열이틀 저 달빛’ -정찬일 시 무등이왓부분.

 

안덕충혼묘지 가는 길

 

  잠복학살 터는 마을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동산에 있어서 당시 낮은 초가집 골목길로 사람이 다니는 것은 쉽게 간파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안온한 마을에 10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희생되고 마을마저 사라져 버리는 현대사의 비극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쳐진다.

 

  마을을 돌아 나와 원물오름이 바라다 보이는 작은 길로 들어섰다. 그곳 길가에 세운 조그만 43길 안내판에는 충혼묘지까지 1.1km라 적혀 있다. 걷는 게 조금 거북해지려 할 때 열매가 빨갛게 익은 보리밥나무가 눈에 띈다. 우리 동네에선 보리볼레라고 하는데, 다른 곳에선 마께볼레’, ‘먹볼레’, ‘밋볼레라고도 부른다. 크기가 제법 커서 배고플 땐 허기를 채우는데 도움이 되겠다. 요즘 안덕면 중산간 지역에 제법 많이 퍼져 있는데, 43때 배고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안덕면 충혼묘역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산화한 유공자 여러분이 묻혀 있는 곳이다. 원래 화순리 속칭 살래동산에 마련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1999317일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원물과 원물오름

 

  오름으로 오르는 길에는 충혼묘지와 이웃하여 돌로 울타리를 두른 원물이 있고, 조그만 정자를 세웠다. 옛날 이왕원(梨往院)이 있었다고 해서 조그만 안내판을 세웠으나 그 자리는 어딘지 알 수 없고, 또 한국전쟁 때 모슬포 제1훈련소 숙영지가 섰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자취가 안 보인다. 다만 아래쪽으로 평평한 들판, 지금 건물들이 들어선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왕원(梨往院)’을 국영여관이라고 소개한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관()은 조천관(朝天館)과 영천관(靈泉館) 두 곳만 운영했고, 나머지는 원()이다. ()은 주현(州縣) 내의 관()과는 구별된다. ()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공무를 위한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인이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주로 이용되었다. 당시 제주목과 대정현 사이에는 소길리 원동에 광제원(光霽院), 그리고 이곳에 이왕원(梨往院)을 두어 머물게 했다. 말을 타면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다.

 

  그리고 원물오름은 원이 설치되기 전에는 감낭오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 1704년에 만들어진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대정읍의 오름에 원물오름은 없고 감낭오름만 나오며, 감낭오름에 샘이 있다고 했다. 오름의 끝자락이 아우러져 있어 같은 오름으로 본 것 같다. 같은 동광리에 거린오름이 있어 둘을 하나로 보았다가 나중에 북쪽의 것을 북오름으로 따로 부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연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돌아오는 길, 오늘 따라 미세먼지가 유난히 짙다. 그 짙은 먼지 너머로 정처 없이 걸어가는 피난민의 군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광풍(狂風)의 세월이었다. <>

 

                *이 글은 뉴제주일보 2021년 5월 11일자(12면 기획기사)에 필자가 썼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