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숲길
‘서귀포 삼촌들이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 찾아낸 숲길 구간’이라는 부제처럼 매화원에서 냇가를 따라 ‘서귀교’ 다리 밑을 오르내리는 좁은 길. 고기 낚으러 바다로 오가거나 천지연을 들락거리던 ‘샛길’로 짐작되는 정감 있는 길이다. 진입로에 곱게 핀 팔손이가 아는 체를 하고, 계단을 따라 내리면 아직 폭포가 아닌데도 물소리가 요란하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다리 위로 돌아가야 한다.
운동장으로 나가면서 보니 무덤 한 자리가 고즈넉이 자리 잡았다. 작년에 분명히 벌초를 했을 텐데도 따뜻한 곳이어서 그런지 고사리가 가득하다. 고사리 사이로 표석과 동자석이 숨바꼭질 하는 것 같다. 넓은 곳으로 나오니 커다란 초생달 모양의 구조물이 서 있는데,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으로 한라산을 지향한다고 풀이했다. 억새가 보송보송하게 잘 자라 무더기를 이룬 곳에서 사진 한 컷.
□ 작가의 산책길과 파초일엽
아직 시공원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작가의 산책길’이라고 쓴 팻말이 보인다. 안내문에는 서귀포에 머물며 빛나는 명작들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도보 탐방 프로그램이라 했다. 이중섭 공원을 기점으로 이중섭미술관, 아트하우스, 기당미술관, 칠십리 시공원, 자구리해안, 소남머리, 서복전시관, 왈종미술관, 소정방폭포, 소암기념관을 잇는 3개 코스, 약 10km 길이다.
넓은 운동장이 끝나는 곳에 양중해 선생의 ‘마라도’ 시비가 서 있다. 문장론 강의 시간에 자신의 ‘관덕정’이란 시의 첫 행을 칠판에 쓰고는 “아무도 없구나!”라고 읊으며 멋쩍어 하던 선생님의 넉넉한 미소가 떠오른다. ‘밀물이 밀려오면 썰물이 가고, 썰물이 내려가면 밀물이 오는 것// 오면 가지 말아/ 가면 오지 말아’라는 시구처럼 2014년 4월에 가시고는 영영 소식이 없다.
무지개 나무다리를 지나 큰길과 만나는 곳에 파초일엽이 많이 퍼졌다. 파초일엽은 섶섬에서 자생하는 양치류 꼬리고사리과의 관엽식물이다. 열대식물로 따뜻한 바닷가의 나무나 바위에 서식하며 멸종위기 야생식물(Ⅱ급)이자 국가적색목록 위기(EN) 등급을 받았다. 이 식물이 자생하는 서귀포 섶섬은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지정 보호 중이다.
□ 서귀포 칠십리 시공원
대나무들 사이로 난 샛길을 걸어 나가면 시 공원의 시비(詩碑)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시인들의 서귀포 관련 시 작품 12기와 노래비 3기를 세웠다. 공원 설립 취지문에는 ‘한반도의 최남단 서귀포시, 그 이름만으로도 시심이 흐르는,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고장, 일찍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이상향으로서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도시를 지향하는 그 숭고한 가치를 향유코자, 우리 고장을 노래한 주옥같은 시편을 모아 시비를 세운다. 시민들에게는 정서를 함양하고, 드높은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키고, 찾는 이들에게 우리 고장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널리 선양한다.’고 했다. 2008년 서귀포시(시장 김형수)와 서귀포문인협회(회장 오승철)의 합작품이다.
그 중 정지용의 ‘백록담(白鹿潭)’에서 발길이 멈춘다. ‘백록담’은 1941년 문장사에서 발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한데, 원시에는 ‘한라산 소묘’라는 부제가 붙었다. 오래된 글이라 한자어가 많고 표기가 거칠다.
‘8. 고비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石茸(석용)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高山植物(고산식물)을 색이며 醉(취)하며 자며 한다. 白鹿潭(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여 山脈(산맥) 우에서 짓는 行列(행렬)이 구름보다 莊嚴(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白鹿潭(백록담) 푸른 물에 하눌이 돈다. 不具(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좇겨온 실구름 一抹(일말)에도 白鹿潭(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白鹿潭(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祈禱(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정지용의 ‘백록담’ 부분
□ 서귀포층 패류화석
천지연이 내다보이는 포토 존에서 사진도 찍고, 새섬 전망대에서 서귀부두와 새섬 쪽을 살피고 나서, 남성중로를 따라 새연교로 내려간다. 가파르기도 하고 주변에 소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구불구불 색다른 길이다. 모퉁이를 한 차례 돌고 나면, 부두에 매어놓은 배들과 함께 늘어선 야자수가 이국적이다.
주차장을 돌아 방파제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서귀포층 패류화석 산지다. 천연기념물 제195호로 지정된 서귀포 패류화석층은 해안절벽을 따라 약 400m 두께로 나타나며,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서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층은 제주섬 형성 초기에 일어난 화산활동과 퇴적물이 쌓여 생성되었는데, 고기후 및 해수면 변동을 지시하는 고생물학적, 퇴적학적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
현장으로 내려가면 무너진 지층에서 일부를 옮겨 전시한 것들을 볼 수 있다. 잘 살펴보면 따뜻하고 얕은 바다에서 살던 조개류, 산호, 성게, 백상아리 이빨 등의 화석과 차가운 바다에 살던 생물이 함께 퇴적되어 있어, 제주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대의 해수면 변동과 기후의 변화를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형성과정을 보면 제주도 일대가 얕은 바다였던 약 180만 년 전 지하에서 상승한 마그마가 물과 만나 격렬한 수성화산 활동으로 화구주변에 화상분출물이 쌓이면서 곳곳에 수성화산체들이 생겨났다. 그 뒤 오랜 기간 파도에 의해 깎이고 퇴적물과 섞여 쌓이기를 반복해 약 100m 두께의 서귀포층이 형성되었고, 계속된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그 위를 덮었는데, 그 중 서귀포층의 일부가 솟아오른 것이다. <계속>
*뉴제주일보 2022년 1월 11일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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