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⑧ 산전(山田)
* 4. 3 제60주년을 맞는 '오름 이야기' 블로그 특집으로 졸작 ‘섬에 태어난 죄 - 8’을 세 차례에 나누어 내보냅니다. 이 소설은 4. 3을 다룬 연작소설로, 제주작가 2008년 봄호(통권20호)에 실렸던 것인데, 무장대 이덕구 사령관의 최후를 다룬 부분입니다. ‘산전(山田)’은 개오리오름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이덕구 사령관의 마지막 활동무대입니다. 이곳에 실린 삽화는 지금 ‘제주4.3평화 기념관’ 예술전시실에 개관 기념으로 전시회를 갖고 있는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의 해설서(학고재 간)에서 뽑았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6월 30일까지 전시됩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강제노역'(* 일제 강점기말 결7호 작전의 제주요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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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겡 께게겡 께게게겡---, 케겡 께게겡 께게게겡---.”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우짖는 새끼노루의 울음소리에 잠이 깬 이덕구(李德九) 사령관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조그맣게 터진 창구멍이 희끄무레한 것이 얼마 없어 먼동이 트겠다. 그는 시간을 가늠하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회복 불능 상태에 처한 무장대의 수습책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전전하다가 얼핏 잠에 빠진 것 같다. 그는 간헐적으로 들리는 노루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아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어제 유격대원 몇 명을 데리고 개오리오름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노루가 올가미에 걸려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가서 만져 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고, 젖을 빨았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곳 어딘가 분명 어린 새끼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며 측은해 했었다. 올가미에 걸려 버둥거리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남은 새끼를 생각했는지 눈은 부릅뜬 채였다.
전화선으로 만든 올가미 끝이 녹슬어 있는 걸 보면 묵어 놓은 지 꽤 오래되었다. 바른 길로 잘 다녔는데 죽으려 했는지, 평소 안 다니던 구멍으로 들어가다가 걸린 것이다. 죽은 노루를 떼어놓으려고 나무에 묶인 올가미를 풀려는 순간 “툭!”하고 나무가 잘리며 힘없이 꺾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었더라면 살아날 수도 있었는데….’하고 중얼거리며 유격대원들에게 구렁텅이에 돌을 쌓아 묻도록 지시했다. 그것을 묻는 대원들은 은근히 잡아먹었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너무 잔인한 것 같아 무시해버렸다.
저 소리는 분명일시 어제 죽은 그 어미의 새끼가 틀림없었다. 다시 한 번 노루 새끼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귀에 이명(耳鳴)이 일기 시작했다. 3․1사건으로 잡혀가 고문을 당해 고막이 파열된 후로, 큰 충격이 있거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 간혹 일어나는 증상으로, 처음에는 귓속에서 머리끝까지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있고, 차차 매미 울음소리나 웅성거리는 소리로 이어졌다. 가끔씩 ‘왓샤! 왓샤!’ 하는 소리와 노래도 섞였다.
그 중에는 점호 때 자주 부르던 ‘제주유격대 빨치산가’도 있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는 용감한 전사/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에 울리어 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이어졌다 끊겼다 하는 노랫소리가 오늘따라 맥이 풀렸다고 느낀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운동을 하면서 몸을 풀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는 벌떡 일어나 몸을 비틀었다. 언제나 입고 있는 옷이 잠옷이었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 평상복이 되는 생활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귀한 손님을 만날 때나 공식적인 행사에는 학병으로 있을 때 입었던 위아래가 붙은 일본군 비행복을 차려 입었다. 그는 냇가에 가서 세수나 할 요량으로 돌로 지은 막사(幕舍)를 나와 다시 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6월초라 하지만 산이어서 그런지 으스스 한기(寒氣)를 느낀다. 음력 5월 초아흐레 달은 이미 졌고, 샛별이 높이 올라와 있어 어슴푸레 여명이 비친다. 이곳 냇가는 물이 여러 군데 고여 있어 식수로 사용하는 샘과 그냥 쓰는 물이 구별되어 있다. 이번 겨울은 이곳 산전(山田)과 개오리오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다. 두 곳은 4~5km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산전(山田)은 양쪽 냇가를 통해서 숨거나 도주하기 용이했고, 개오리오름은 숲이 깊고 봉우리가 많아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싸울 수 있어 적은 병력으로 대치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인민위원회'(* 해방후 마을, 읍, 면 단위로 생긴 자치기구)
처음에 터를 잡았던 물장오리는 별천지였다. 철철 흘러넘치는 분화구의 물, 장엄한 한라산 아래 불칸디오름과 쌀손장오리, 테역장오리, 물장오리로 둘러친 공간은 평평하고 아늑하여 훈련하기에도 좋았고, 어느 쪽으로 적이 쳐들어오든 삽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분산되어 숨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잰걸음으로 걸어 나오면 산의 남북을 잇는 길이 있어 어디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년 11월 중순의 대공세로 그곳은 초토화되었고, 이곳 산전(山田)으로 겨우 옮겨와 그 춥고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그런 이곳과는 달리 아랫마을에서는 작년 말 계엄령이 해제되었지만 올 기축년에 들어서서도 양민 학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곳 무장대는 새해 첫날을 기하여 악랄하기로 소문난 오등리 2연대 3대대 주둔지를 공습했는데, 중과부적으로 얼마 안 남은 병력 손실만 가져왔다. 삼양리나 협재리 공습도 별 성과가 없었다.
그에 비해 토벌대의 보복은 극심했다.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은 무장대로 위장하여 제주읍 토평리에 난입, 주민들이 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수십 명을 총살시켰다. 이미 피를 보고 악귀로 변한 함병선 2연대장은 계엄령의 지속적인 시행을 요구하며 주민 학살에 열을 올렸다. 초나흘날엔 화북리 곤을동 주민을 집단 총살했다는 보고 등 주민 무차별 학살 소식이 속속 올라왔었다.
이에 분개한 무장대는 남원면 의귀리에 주둔해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곳에 수용되었던 죄 없는 주민만 수십 명 집단 총살당했다. 중순에 들어 마을 인근에서 군인들이 기습 받은 데 대한 보복으로 조천면 북촌리를 불바다로 만들며 이틀 동안 주민 수백 명을 총살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연실색했다. 더욱이, 2월 들어 가까운 곳에 있는 봉개지구에서 육해공 합동작전을 벌여 수백 명을 살해했다는 보고는 전의(戰意)를 상실하기에 충분했다.
이대로 더 버티어야 할 것인가? 그는 지금 각 지대에서 보고가 제대로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도 사살되었거나 무작정 숨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럴수록 군경이 증파된다는 어두운 소식은 계속되고, 이곳 산전(山田)에 남은 무장대원 동지들도 부상병 일색에다 제대로 된 간부도 없기 때문에, 바짝 엎드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상황이 막막하고 외롭기만 했다. 이럴 때 좌구(佐九) 형이라도 있었으면….
어렸을 적에 일본으로 건너 가 큰형(호구)의 보호 아래 둘째 형(좌구)을 의지해 자란 그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면 무엇이든 척척 해결해주던 둘째 형을 생각했다. 여덟 살 터울의 둘째 형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러기에 오사카 미오키모리국민학교 때부터 일신상업고등학교, 입명관대를 거치는 동안 형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해방 후 제주도로 건너 온 큰형은 고향에 중학교를 설립했으며, 둘째 형은 남로당 제주도당 총무부장을 지냈다. 해방 후 그는 아버지의 종용으로 서울에서 생활했는데, 제주에서 일하는 둘째 형이 같이 있자고 불러들여 조천중학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지냈다.
그러다가 큰형이 숙환으로 먼저 죽고, 둘째 형이 1.22 사건에 그와 같이 검거되었다가 풀려난 뒤 봉기를 전후해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 것이다. 둘째 형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심취했던 노동운동이나 유물사관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모른 것이 없었고, 그 영향으로 이 사령관 역시 그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둘째 형으로부터 어려움에 봉착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왔다.
*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3. 1 대시위' (* 1947년 3월1일 사실상 4. 3의 도화선. 부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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