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여름호와 참나리꽃

김창집 2008. 7. 11. 00:29

 

별도봉 기슭, 참나리 흐드러지게 핀 날에 ‘제주작가’ 2008년 여름호가 도착했다.

계간지가 된 후로는 두 번째. 특집으로는 ‘평화공동체를 꿈꾸는 상생의 문학’이 실렸다. 

현기영 선생의 ‘망각에 저항하는 문학’, 고명철 평론가의 ‘제주, 평양 그리고 오사카’,

그 외로 오키나와의 가와마츠 신이치, 김응교, 대만의 란보저우, 신정호의 글이 있다.

   

‘작가를 찾아서’는 김순남 시인, 김병택 교수의 기획 연재 ‘제주예술의 사회사’는

‘일제강점기 제주 예술의 성격(1)’을 다뤘다. 갈수록 인기가 높아가는 제주어 산문은

고정국 시인의 ‘대비 두 배썩 포신어가멍’, 그리고 소설은 양영수 교수의 ‘오름친구들’,

수필에는 문영택, 양남수, 이연실, 평론에 장영주의 ‘북한 문학 동화’ 가 나왔다.


시는 김수열 김백겸 김광렬 문무병 김경훈 김석교 정군칠 강동완 김문택 김영미 김순선,

시조는 오영호 장영춘 홍경희 한희정 김영숙 김진숙 고춘옥 서순영이 썼다.

포토 에세이는 이종형 시인의 의귀 수망 한남 해원굿 사진과 ‘허공의 저 몸들을 보라’라는 글,

‘책머리에’는 김석교 편집위원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문학적 응전과 과제’를 실었다.

 

 

♣ 햇살 좋은 날 - 김순남


억겁을 내리 싸인들

저리 청아한 걸음 놓을 수 있을까

순백의 한라산은 차마 돌아눕지를 못한다.


숨 멎은 바다

햇살 쏟아져 비단길로 반짝이는데

맨발로 뛰어가면

시퍼렇게 날 세운 수평선 걷혀질거나


그러면 

발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간지럼 타고

저 무욕의 시간을 갈 수 있을까

햇살비단 깔아놓은 바다 저편에

은유로 흐르는 이 목숨의 유토피아가

있을지도 몰라


하늘과 바다와 바람이

햇살에 마냥 좋아서

차라리 죽고 싶어 죽고 싶어서

 

 

♣ 그 손의 이름을 물을 수 없었다 - 김수열


꽝아이 외떨어진 바닷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그 사람

키는 작지만 눈빛만큼은 별처럼 빛나던 그 사람

전쟁 중에 한국군과 맞서 싸우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그 사람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내 손을 덥석 잡고

‘한꿔 한꿔’

엄지손가락 치켜세우고

비좁은 골목골목 안내해주며

차 한 잔 하고 가라던 그 사람

헤어질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우리 일행이 흙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마음의 끈을 놓지 않고

하염없이 눈길을 주던 그 사람


해거름에 탄타오 시인을 만나

그 사람 이름을 묻지 못했다 하니, 시인은

그 이름을 ‘꽝아이’라 하자 한다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별빛 또한 유난히 깊은 밤이었다

 

 

♣ 가면 얼굴 - 김광렬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가면을 쓴 것 같아

얼른 손이 얼굴로 간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내가

가면을 쓴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은 진짜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층 저 깊은 곳에 비밀히 박혀있는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많은 죄의 씨앗들이 어느 날

두엄더미를 비집고 나온 구더기처럼

오물거리며 기어 나올 거만 같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내가

가면을 쓴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저기 저 가면을 쓴 사람아

어느덧 너는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

쿵쿵, 검은빛 건반을 두드려댄다


 

♣ 2008년 4.3 문학기행으로 이덕구 ‘산전(山田)’을 다시 찾으며 - 문무병


유세차

무자년 4.3 회갑년(回甲年) 4월 스무엿샛날

산전에도 새날 밝아 하늘, 땅 열렸습니다.

그 날, 1994년 황량한 겨울

민예총 초대회장으로 4.3연구소 초대 사무국장을 맡으며 처음으로

4.3 당시 봉개 마을의 소년 문서연락병이었던 어르신을 질토레비로 모시고

현기영, 오성찬 선생과 전국에서 모여온 몇몇 역사학도들과

처음으로 찾아갔던 당신의 산전에 오늘,

2008년 4.3 60주년 문학기행에 동참한 일행들과 다시 찾아 와

당신의 아지트(山田)에서 고사리를 한줌 뽑아 안으며

한라산을 주름잡던 빨치산, 조상님들 누워 있는 이 무덤 위에

인정 잔 기울이고, 소주잔 기울여

허공중에 흩어진 넋을 찾고 혼을 주워 모아,

조촐한 다과와 술, 원미 한사발로 조상님들 모시려 합니다.

무자년 그 더러운 시절에, 세상인심 야박하여

주린 배 움켜쥐고, 산행하던 조상님들,

죽어 ‘4.3본향당’ 당신이 된 하로산또여!

인정 잔 소주잔 받앙 갑서

소주에 계란 안주 먹엉 갑서

부서진 솥, 부러진 숟갈로만 남아 있는,

선생의 산전에 와서 고사리를 꺾으며

청명 삼월의 물찻오름 기슭 당신의 산전을 찾은

4.3 문학기행 순례자들을 반갑게 맞아

항쟁의 숨은 뜻을 배우고 가게 하옵소서.

물찻오름 기슭 당신의 산전‘을 찾은 뜻을 얼리 헤아려

오늘의 산행을 신명나게 하소서.


 

♣ 아픔을 잊고 기억을 나누는 집 - 김경훈

  - 진아영 할머니 삶터 개관에 부쳐


단 한 번

남 앞에서 밥 아니 드시던

누가 볼세라 할머닌 홀로 먼 마실 가셨지만


말 못한 유언처럼 휑하니 남은

집 한 칸, 헐고 낡고 터져 아픈 기억을


한 땀 한 땀

고운 바느질이 옷 짓듯


우리가 아들 되고 딸 되고 조카 되고 손주 되어

새 보금자리 틀었으니


선인장 핏빛 상처 속에

샛노란 꽃이 돋듯

마실 다녀오신 할머니


한 땀 한 땀

아픔을 잇고 기억을 나누듯


어깨 주무르고 등 긁어 드려

아이들 맑은 노래 고운 웃음 가득

낭푼밥 함께 나누리

 

 

♬ 클래식 기타 연주곡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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