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밤꽃과 붉은발말똥게

김창집 2012. 6. 7. 00:40

 

다음 주에 답사가게 될

한천을 따라 걷는 오라올레길을 가다가

진한 밤꽃 냄새를 맡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 사진과 함께

정드리문학회 동인지 제3집

‘붉은발말똥개’의 시를

세 번째로 내보낸다.

동인들 작품 말고 특집으로 엮은

초대작가들의 시도 섞였다.  

 

 

♧ 붉은발말똥게 - 허은호

 

냇물 한 모금에도 말똥 냄새 묻어난다

지렁이 갈대 뿌리 죽은 은어 창자까지

와드득 집게이빨로 씹어대고 있었다

 

해군기지 찬성 반대 포클레인 서너 대

강정은 철거지역 구럼비해안 발파소식

바다도 숨비소리로 부서지고 있었다

 

슬금슬금 게눈질, 떠나는 게 사람뿐이랴

흡사 그 예비검속령 잡혀 나온 303마리

난리 때 난리 때마다 강제 이주 당했으니

 

이 당 저 당 해도 괸당이 제일이라는

절에서도 교회에서도 말문 닫은 친척들

약속의 악수 끝에서 꼭 깨무는 집게발  

 

 

♧ 숨비소리 - 조영자

 

나는 강정 바다 열세 살 해녀였다

더블클릭으로 위내시경 열어보면

허기진 만성위염이

너덜너덜 붙어산다

 

그렇지, 숨비소리 그것이 숨어있었지

꿩망골 장기소리 바다엔 숨비소리

그 바다 매립된다는

소식이나 전해준다.  

 

 

♧ 오사카의 아침 - 최원정

 

오사카 다다미방에 차려진

 

새해 아침 차례 상에는

 

내 어머님 손으로 따신

 

한라의 빛 좋은 고사리

 

제주항의 고향 생선이 올랐다  

 

 

♧ 소가 혀로 풀을 감아올릴 때 - 강영란

 

수굿하게 고개 숙이고

 

상냥한

콧김

입김

땅에게 바싹 절하고

 

조심조심 혀로 풀을 감아 올린다

 

뜯어먹어 미안하고

상처 냈으니 미안해서

침을 한번 쓰윽 묻혀준다

 

때로 몸의 상처는 침도 약이 되어서

온 들판에 풀들이 새로 돋아난다  

 

 

♧ 누나 - 고증식

 

  밤늦도록 부엌방에 불빛이 일렁이더니 새벽녘 첫차 타러 나온 내 손에

가만히 물 묻은 손이 다가와 얹혔다 시댁식구들 몰래 따라 나온 구겨진

지폐 몇 장  

 

 

♧ 향낭 - 김강호

 

차오른 맑은 향기 쉴 새 없이 퍼내어서

빈자貧者의 주린 가슴 넘치도록 채워 주고

먼 길을 떠나는 성자

온몸이 향낭이었다

 

지천명 들어서도 콩알만 한 향낭이 없어

한 줌 향기조차 남에게 주지 못한 나는

지천에 흐드러지게 핀 잡초도 못 되었거니

 

비울 것 다 비워서 더 비울 것 없는 날

오두막에 홀로 앉아 향낭이 되고 싶다

천년쯤 향기가 피고

천년쯤 눈 내리고……  

 

 

♧ 봄눈에 부쳐 - 김선희

 

구곡폭포 가는 길에 헝클린 맘 부려본다

춘분도 한나절인데 싸락눈발 저 회오리

돌아갈

길이 없다고

바람결에 쏘다닌다

 

새우눈 뜬 길섶 꽃들 까치발로 오르다가

벼랑 끄트머리에 벙글어 피는 뜻은

이제야

엉킨 실타래

풀어내는 손짓이다  

 

 

♧ 식물적인 죽음 - 나희덕

 

창으로 빛이 들면

눈동자는 굴광성 식물처럼 감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희미해져 갈 때마다

숨소리는 견딜 수 없이 가빠졌다

 

삶의 수면 위로 뻐끔거리는 입,

병실에는 그녀가 광합성으로 토해놓은 산소들이

투명한 공기방울이 되어 떠다녔다

 

식물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공기방울에서는 수레국화 비슷한 냄새가 났다

천천히 시들어가던 그녀가

침대 시트의 문양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빛을 향해 열렸던 눈과 귀가 닫힌 문처럼 고요해졌을 때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도 사물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 떨기 죽음으로 완성된 그녀

 

죽음이 투명해질 때까지

죽음을 길들이느라 남은 힘을 다 써버린 사람

모든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수레국화 한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