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와
석류꽃이 피었겠다 싶어도
부러 외면하면 지낸 것 같아.
그래 제숙 사러 보성시장 다녀오다가
광령초등학교 북쪽 울타리 안에
석류꽃 이렇게 핀 걸 보고 깜짝 놀랐네.
옛날 중국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의 ‘석류’시
‘푸른 잎 사이에 핀 한 송이 붉은 빛
봄기운 느끼기에는 그걸로 족하네.’에서
‘한 송이 붉은 빛’이 홍일점이 되었다지만
이건 한두 개가 아니고 너무 많다.
너무 높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기 때문에 올라가봐야 건질 건
별로 없었다.
♧ 석류꽃엔 눈물샘이 있다 - 박백남
우리 집 뒤란에 홀로 서 있는 석류나무, 생전의 어머니 같다 서까래로도 쓰이지 못한 그 가냘픈 몸매, 자식 낳듯 세상에 초록 꿈 풀어 지붕을 만들던 힘은 흙에서 밤새 길어온 물이다 그 물은 석류잎삭에 반짝이는 이슬이 아니라 석류꽃이다 물동이 머리에 이고 황톳길 언덕을 힘겹게 넘어서며 얼굴 붉히던
그대 그리다 눈시울 붉어지듯 석류꽃 다시 피고, 초록 이파리에 이슬 떨어지듯 석류꽃 지고, 눈썹처럼 파르르 떠는 꽃잎 진 자리, 그곳에 석류알 그렁그렁 맺혀들어 가슴 깊이 빛나던 햇살 햇살들
그대 눈빛처럼 무척 따스하다 따순 눈빛에 비로소 가슴 맑게 틔여 세상을 바라다 보니 내 가슴속 알알이 맺힌 석류알
도저히 석류알을 깨물지 못하겠다
♧ 석류, 그 붉은 진실 - 김윤자
그대에게 가는 길은
늘 침묵이어서
가슴 속에 한가득
보석이 든 줄이야
붉게 익혀서 우수수 쏟어내는
진실에 눈부시어
한 알만이라도 어그러져 보라고
깨어져도 아름다울 거라고
손안에 보듬어 안은 보석들
알알이 꿰어
우리가 건너야 할 남은 강가에
호롱불로 걸어두면
하얀 바람도 화사하겠지
침묵을 사이에 두고
단단하게 제련한 고독이
여문 사랑일 줄이야
♧ 석류 - 전병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너만을 찬양할 때
애오라지 다만 너는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감으로
너만을 그리며 흠모해 보일 때에도
애오라지 다만 너는 딴곳만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바람 불고 낙엽져서
우리들 모든 것 끝나버린
계절의 중간 쯤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너에게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노라고
먼산 바라며 두 눈 감을 때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눈물을 터트리며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사랑을 나에게 얘기했다
♧ 석류꽃이 걸어갔다 - 김종제
어제 꽃비가 내렸는지
석류나무에 화색이 만연하다
한 편 서사의 인생 같아서
요절하는 꽃도 있고
목숨 놓는 꽃도 있는데
떨어진 꽃 한 송이가
마지막 가는 길의 말씀 같기도 하고
회한의 눈물 같기도 하고
몇 송이 떨어진 바닥을 보니
들어갈 무덤이 보이고
저를 죽인 희생의 발자취 같은데
꽃이 나보다 늦게 나와서
나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갔으니
꽃 피고 지는 것이
생을 깨우치는 일이 분명하여
석류 열리기 전에
꽃 피어야 하는 이유와
피기도 전에 꽃 떨어지는 이유를
나무에 앉은 새에게 묻는다
꽃 걸어간 길 쫒아간다고
새 날아간 자리에
열매 하나 일찍 맺혔다
지난 번 그곳에서 석류 한 알 얻었는데
먹지도 못하고 버려둔 씨앗들이
꽃으로 피고 진 것일까
피 흘리는 가슴을 안고
석류꽃이 걸어오고 있었다
♧ 석류꽃 - 오세영
짓밟혀도
순결만은 지킨다는 것이냐
마른 하늘의 날벼락 맞아
육신은 지금 땅에 떨어졌다만
아니다.
정신까지 더럽힐 순 없는 것,
광란의 여름은 가고
오늘 나는 보았다.
마른 가지 그 꽃잎 진 자리
석류 한 알 푸른 하늘을 향해서
하얀 이 드러내
비웃고 있음을
마음에 없는 것은 또한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 석류꽃 - 나태주
들판은 이제
젖을 대로 젖은 여자
사타구니
까르르 까르르
개구리 알을 낳고
꽈리를 불 때
바람은 보리밭에서
몰려오고
담장 아래
석류꽃 핀다
옴마 징한 거
저 새빨간 피 좀 봐
흰구름은 또 장광 너머
엉덩이 까벌리고
퍼질러 앉아
뒷물하느라
눈치도 없고
코치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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