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 1
동풍이 불었다. 대나무 숲에서 속삭이는 소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발사가 몰래 풀었는데 이젠 대나무들이 소곤거렸다. 궐내사람들이 관모를 눌러 씌워서 임금님 귀는 음지의 귀가 되었다고 그래서 징소리도, 해금소리도 듣지 못한다고 귀엣말을 해댔다. 이런 소문을 새나 쥐가 저잣거리로 물어 날랐다. 임금님 귀는 음지에서만 열린다고 관모에 가려서 평형감각이 없어졌다고 이젠 궐문에 들어가기도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잣거리가 소곤소곤 와글와글거렸다. 결국 궐밖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라고 연좌 시위를 했다. 어서 관모를 벗으라고 난쟁이, 떼잡이, 땅거지 소리도 잘 들어 달라고 촛불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임금은 관모를 벗지 않았다. 거슬리거나 막아서는 말은 내치고 안으로 굽는 말만 받아 들였다. 이렇게 귀가관모에서만 놀다 보니까 내리는 말마다 법이 되고 칼이 되어서 때리고 쪼아대고 내몰기만 잘 했다.
♧ 귀 2
임금님이 병환중이다. 이명 때문이라고 했다. 귀뚜라미, 매미 소리 때문에 옥체가 많이 상했다고 했다. 그런데 궐 안에는 아무런 음원도 없었다. 이상했다. 그렇게 나지도 않은 소리가 증폭되어서 어떻게 이명에 빠졌다는 것인지 어의가 백방으로 뛰어서 기능성 탕약을 쓰고 시침을 했어도 이명만 깊어져서 아예 귀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궐 밖은 음원이 많은 데도 이명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귀뚜라미, 매미 소리 요란해도 밤은 고요하고 거룩했다. 말이 통하고 피가 통하다 보니까 반향의 불면증 같은 것도 없었다. 입과 귀가 자유롭다 보니까 소리들이 강물처럼 바람처럼 잘 통한다고 했다.
명의를 찾는 방이 붙었다. 임금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린다는 방이었다. 이에 용하다는 의원들이 나섰으나 이명에는 차도가 없었다. 보이는 소리만 고치려고 애쓰다 보니까 파도소리, 바람소리만 요란하다고 했다. 두 귀의 평형이 기울다보니까 전자기기, 금속성 소리까지 끼어들었다고 했다. 궐문에는 막힌 소리들로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 귀 3
임금의 이명이 더욱 심해졌다. 권 안 소리는 잘 들어주면서 궐 밖 소리는 부정하고 내치는 이명들이었다. 궐 밖 사람들은 ‘고소영’들만 백성이냐고 난쟁이 떼잡이 땅거지 소리도 잘 들어 달라고 쇠북을 두드려댔다. 하지만 임금은 기나 고동이나 목소리만 높인다고 끄덕도 안했다. 오히려 궐 밖 사람들이 이명만 도지게 한다고 혹세무민한다고 코에 걸고 귀에 걸어 잡도리했다. 이에 궐 밖 사람들은 재차 촛불을 들었다. 백성의 임금이라고 조선의 고뿔이라고 하면서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하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어댔다. 임금은 그들이 생떼 쓰고 콜록거린다고 이단으로 반동으로 몰았다. 임금의 조치는 단호하기만 했다. 좋은 소리 듣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법과 질서를 강조했고 강자의 원칙으로 밀어붙였다.
궐 밖 사람들을 묶어대는 억지 법들이 생겨났다. 도로교통법, 전기통신법, 집단행동 금지위반으로 걸어서 벌금을 때리고 구속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궐 밖 사람들도 방어진을 치고 더 많은 이명을 만들어내었다. 궐 밖 소리란 소리들이 일터에서 거리에서 망루에서 고주파로 퍼져나갔다.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는 것이라며 궐문을 향해 우각을 마구 불어댔다. 이에 임금은 귀의 문은 물론 말의 문까지 아예 닫아걸고는 병력을 출동시켰다.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압수되었고 목소리가 있는 곳마다 몽둥이가 뛰었다. 길이란 길들이 봉쇄되었고 입이란 입들이 닫혔다. 이태백 사오정 명퇴들이 숨죽이고 토박이 철거민 부랑인들이 땅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입이란 입이 봉쇄되니까 저잣거리에는 흥정하고 수긍하는 일상이 사라져버렸다.
♧ 귀 4
임금님은 고뿔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고뿔들이 사사건건 임금의 이명을 도지게 한다며 기침소리 규제법을 공포했다. 기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치주의였다. 그러나 고뿔들도 이에 맞서서 신종 기침소리를 만들어내었다. 법망에 걸리지 않는 기침소리였다. 그리고 더 요란하게 궐문에 대고 기침을 해댔다. 임금은 이것을 난동이라고 했다. 두려운 반역으로 몰아서 잡아들였다. 옥사에는 난쟁이 떼잡이 철거민만 넘쳐났다. 그래도 고뿔은 끝나지 않았다. 사는 집을 잃고 생업을 잃고 이제 남은 것은 고뿔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뿔들은 망루에 올라서 대궐에 대고 구애의 기침을 마구 해댔다. 임금은 귀가 아프다 못해 부어올랐다. 저런 고뿔들은 초장에 뽑아 버려야 한다며 용역을 부르고 병력을 동원해서 망루를 공격했다. 인명도 돌보지 않는 진압작전이 벌어졌다.
고뿔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질긴 고뿔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 하늘에서는 기침소리만 요란했다.
♧ 귀 5
대궐로 가는 행길이 막혔다. 임금님의 홍색증 이명을 고친다고 마파람 막아대는 인의장막이 쳐졌다. 문지기가 겹으로 음원을 차단했고 고관대작들이 사인교로 산성을 쌓아대니까 2중 3중으로 행렬만 길어질 뿐이었다. 육조대로六朝大路 사대문이 막히면서 청계천이 위험수위를 넘어서서 궐 밖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궐내 광통교, 수표교가 잠기면서 백성들이 피난길에 나섰다. 인재였다. 운종가 시전 거리도 넘치고 거리거리마다 고기들이 뛰었다.
전문가들은 재앙을 막으려면 임금의 예장용 관모를 벗겨야 한다고 했다. 턱밑까지 눌러씌운 임금의 관모가 궐문을 막고 행길을 막아서 세상의 소리란 소리들이 병목한다고 했다. 소리보가 되어서 한꺼번에 빗발치고 있다고 했다. 대궐에서 마포나루까지 이어진 행렬의 아픈 소리들이 송곳이 되어서 계란이 되어서 임금의 관모를 벗기고 있었다.
- 시집 '나쁜 사과(2012, 시와 산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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