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낙비가
두 줄기 내렸다.
100mm 예상이라
후두둑거리며 굵게 오긴 했으나
두 차례 다 5분을 넘기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갑자기 다녀올 오름이 있어
부랴부랴 갔는데, 감질나는 비도
신발과 양말을 다 적셔
질퍽거리며 다니게 했다.
하긴 지난 토요일에
벌써 피어난 법정악의 벌개미취가
가을을 알리는 전조라 보았는데
열대야는 결국 몰아낼 것 같다.
♧ 처서 소묘(素描) - 박인걸
낮달 선명한 하늘에
햇살도 기가 꺾이고
느티나무 짙은 그늘에는
엷은 한기가 맴돈다.
귀뚜라미 처량하고
풀벌레 울음 애절한데
곱게 분장한 코스모스는
그리움을 가득물고 있다.
거칠게 부대끼며
생존의 몸부림으로
치열한 계절을 넘어온
野草들이 숭고하지만
이미 끝난 게임
점점 기우는 분위기
白露가 저만치서 기다린다.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라.
♧ 처서處暑 - 박얼서
발톱 세우던 더위가
담장 밖 동태를 살핀다
입추를 지나온 군상들
바람의 서곡들만을 골라
세월의 길목 부릅떠가며
이십사절기를 센다
시간여행 벌판을 달렸어도
아직 때 이른 가을자리
저 너머 백로(白露)
좀 더 가까이
한 달음에 내달려오도록
하늘 길을 닦고 있다.
♧ 처서處暑 언저리 - 許明
젖무덤
열어젖힌
고즈넉한 가을녘
산 아래 노을은
못내 아쉬운 선홍빛 아픔
간밤에 여문 가을이 낮달 내어걸다.
♧ 처서 무렵 2 - 박종영
대장간 풀무질에 번득이는
불꽃이 아니더라도
가슴 데우는 늦더위에
손바닥 부채로 불러들이는 서늘한 바람
처서 지나고 나면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에도 누그러질 거라 믿었던
초가을 볕은 아직도
까마귀 대가리에서 번들거리고
푸른 논배미 장리 벼는
올올히 배부른 이삭 배고 서서
스적스적 윤기를 더해가고
*만물에 논 구석 돌아치며 뽑아내는
아득한 들소리 밀려오면
덩실덩실 허드렛일꾼 어깨춤이
절로 풍년이네
---
* 만물(농업) : 그해의 벼농사에서 마지막으로
논의 김을 매는 일
♧ 처서(處暑) - 강계순
--작은 손 4
찌르릉 찌르릉 땅 울리면서 단근질하던 태양
숙지근하게 근육 풀고 물러 앉자마자
한소끔의 바람 옮겨와서 쏴아 뿌리고 가는
보이지 않는 작은 손
기습적으로 퍼 붓던 여름 소나기 맞으면서
푸른 잎들 뒤에 숨어 숨 가쁘게 매달려 온
조그맣고 둥근 대추알들 문득
몸 반들반들 빛내고
죽은듯 엎드려 있던 가을꽃들
짧게 남은 날 위해 다시 천천히
허리 펴고 일어선다.
혹독한 여름 내내
이해하기 힘든 책과 씨름하면서
풀 죽어 끙끙대던 나도
이제 서늘히 일어서는 능선을 따라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 처서 무렵 - 박덕중
한여름
불칼 휘두르던 번개
하늘 무너질 듯 쾅 쾅 대던
천둥 소리도
멀리 사라지고
가을의 언덕
태아를 위해
고개 숙여 묵상하는 오곡들
어머니 같은 마음
사랑 듬뿍 쏟아
태아의 속살 위해
하늘도 사랑 베풀어
황금빛 햇살
열매 속 물이 들 때
만삭이 된 들판
바람도 조심조심 스쳐 가고
어디서 망치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 가을 엽서 - 김설하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구름을 이고
계절이 공존하는 여름 끝 후미에서
멀리 푸른 들판을 본다
청춘을 불사르는 호된 몸살을 앓고
또 하나의 젊음이 소리없이 떠난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새들은 보금자리로 찾아드는 저녁 무렵
처서를 넘기고도 매미 울음 질기다
인생의 한순간은 왔다가 사라지는 것
떠나는 자들을 싣고 기차가 레일 밟는 소리
멀어지는 것들은 미련없이 언제든 가라
귀밑머리 흔드는 바람이 선들 들어서면
삶의 뒤안길 늙음이 무에 안타까우랴
내일은 위해 비워둔 여백에 황혼이 붉다
짙푸르던 나무가 우우 휘파람 부는
입술이 붉어지니 가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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