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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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늄, 여름을 노래하다

김창집 2012. 8. 26. 00:14

 

지금 TV에서는 제주 앞바다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 속 풍경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지금 제주 연안 바다는 대부분 갯녹음 현상으로

사막화 돼버린 느낌이다.

고향 바닷가도 얕은 바다는 거의 해조가 없다.

그러기에 고기도, 해산물도 고갈 상태다.

용궁을 상상하게 하던 그 때의 바다가 그립다.

 

제라늄은 쥐손이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30~50cm이며, 잎은 잎자루가 길고

심장상원형으로 톱니가 있다.

여름에 긴 꽃줄기 끝에 붉은 꽃이

산형으로 달리는데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 빛깔의 꽃이 핀다.

남아프리카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재배된다.  

 

 

♧ 시인의 묘 - 황인숙

 

그의 죽음의 잠의 침대 머리맡에는

초 한 자루 없어요. 당연하죠. 뭣에 쓰겠어요?

(하지만 생전에 그가 켰던 초들이

일제히 밝혀져 있는 걸 내가 못 보는 건지도 모르죠.)

 

시든 꽃다발 위로 붕붕

파리가 날아다녀요.

 

생전에 자주 부풀었을 그의 눈두덩을

다독다독 아주 다독여온 햇빛이

살아 있는 이들의 눈알을 빨갛게 해요.

(그의 삶이 새나가게 한 상처 구멍은

무서움이 만든 것이었을까요, 서러움이 만든 것이었을까요?)

 

파삭파삭 잠들어 계신 그이

얼마나 다행인가요.

불면이 무덤 속까지는 가지 못한다는 것이.

(잠들지 못하는 영혼 그것은 산 자의 것이죠.)

 

그의 이웃의 가족이 된지 얼마 안 된 듯한

희끗한 머리칼을 질끈 묶은 중년 여인이

씩씩거리며 중얼중얼 화를 내며

묘석 위를 꽃으로 장식해요. 양동이로 물을 날라

아주 깔끔하게요. 자기의 눈은 부풀어 짓무르고

머리는 부스스하면서요.

그녀가 몸을 굽혀 목 떨어진 한송이 꽃을 주워

망설이더니 성큼 걸어와 그의 시든 꽃다발 위에 얹는군요.

그리고 휙 돌아가 묘석을 걸레질해요.

 

 

부러울까? 그에게는 아내가 없었어요.

물론 그가 그 때문에 불행해하지는 않았다지만.

하긴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구덩이 속은 똑같겠죠.

 

여기선 왠지 꽃이 향기가 없고, 그 색깔만 선연해요.

장미, 백합, 제라늄, 자색 붓꽃에 물을 주며

아마 죽음의 웨이터를 마구 윽박지르는

죽음의 술이 취한 아마 자기의 남편에게 마구 욕을 하는

저 사나운 슬픔이 그에게는 얼마나 어색할까요?

 

하긴 내가 뭘 알겠어요?

아마 그가 나에 대해 더 많이 알 거예요.

죽은 이가 볼 수 있다면, 모든 걸 꿰뚫어볼 테니까요.

죽은 이들은 모두 나를 경멸해요!

아니면 연민하겠죠. 그들은 다 알아요.

 

시든 꽃다발 위의 생생한 꽃 한송이.

저 여인도 그를 아는가봐요. 나중에 좀 위안이 되겠죠.

이젠 가봐야겠어요.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내 취기를 깨우는 군요.

무섭고 서럽게도요.

 

햇빛의 굴렁쇠가 천지에 굴러다녀요.

햇빛은 따스하고, 무자비하죠.   

 

 

♧ 노을의 향기 - 최정희

   --장미노을 22

 

뉘엿뉘엿

창가에 어둠이 몰려올 때

고독은

온몸에 휩싸인다

 

홀로 저녁 하늘 우러러보면

문득

장미빛 구름 향기가

마음속에 저려온다

 

고독이 이처럼 향기로울까

새빨간 제라늄꽃이

눈짓을 보내고 있다

 

이 소중한 순간

먼 훗날 그들 가슴속에도

잔잔한 향기는

세상 끝 날까지 흐르고 또 흘러가겠지  

 

 

♧ 사랑의 기쁨 - 안영희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어요

두통으로 쓰러질 것 같은 수수깡 울타리

간신히 창가에 기대 놓고

 

사기화분에 넘치고 양지의 베란다 다 불지를 듯

더 낭자해진 제라늄 불꽃구름 떼들을

 

에워싼 고층아파트 사면 그림자에

갇혀 살던 2년 동안의 옛집에서

한두 송이 피우는 듯 뵈지도 않던

그 별 볼일 없던 것이

가을 겨울 가림없이 저리 장장하고 열렬하게

꽃 피워 대고 있음

 

벽, 벽, 벽

첩첩 콘크리트 단호한 단절벽에

숨막혀 죽은 줄 알았던 희망

어느날 비틀비틀 믿을 수 없이 일어서면

멈추지 못하나요

 

한 세기의 불통을 돌아

그대 팔 벌려 마주서 오면

아아, 멈추지 못하나요

폭발하는 사랑,

아낌없는 일조량 앞에   

   

 

 

♧ 이파리의 저녁식사 - 황병승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어요

어머니 빗소리가 좋아요

머리맡에서 검정 쌀을 씻으며 당신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런데 참 어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두 번 잠에서 깨어났어요

창가의 제라늄이 붉은 땀을 뚝뚝 흘리는 여름 오후

 

안녕 파티에 올 거니 눈이 크구나 짧고 분명하게 종이인형처럼 말하는 여자친구 하나 갖고 싶은 계절이에요

 

 

언제부턴가 누렇게 변한 좌변기에 앉아 열심히 삼십세를 생각하지만 개운하지 않아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저 제라늄 이파리 어쩌면 시간의 것이에요

 

사람들과 방금 했던 약속조차 까맣게 잊는 날들

베란다에 서서 우두커니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놀던 아이들이 지워지고

꿈속의 시계 피에로 들쥐들이

어느새 미끄럼들을 차지하는 사이......

 

거울 앞에 서서 어느 외로운 외야수를 생각해요

느리게 느리게 허밍을 하며. 오후 네 시,

 

바람은 꼭 텅 빈 짐승처럼 울고

 

살짝 배가 고파요   

 

 

♧ 팔월의 와인 - 윤꽃님

 

남자가 세상과 씨름하는 동안

여자는 기다림과 씨름한다.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가고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주가 가고 두 주가 가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간다.

 

흘러 가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구름만이 아니다.

사랑도, 불멸도 흘 러 갈 수 있다.

기억도 흘 러 갈 수 있다.

   

 

그래서 생의 어느 날 문득

제라늄 꽃을 떠올리고

좁은문의 제롬을 말할 수도 있다.

빨간 제라늄 꽃의 화려한 율동을 보고

중학교 때 읽은 하얀 제롬을 생각하다니.

 

그렇다.

세월이 많 이 흘렀다.

의식도 많 이 흘렀다.

 

벌써 인생의 십이월이야.

우리는 곧 제종소리를 듣겠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생각하겠지.

 

포도원에서 팔월의 와인은

꿈꾸며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