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0월호의 시와 구절초

김창집 2013. 10. 19. 17:32

 

추자도에 가서 구절초를 찍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눈에 이상이 있는 상태에선

사진이 맘에 들 리가 없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구절초

향기를 맡아보니 예나 다름없이 맑고

맵시 또한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몇 장을 골라

우리詩 10월호의 시와 함께 올린다. 

 

 

 

♧ 토불 - 차한수

 

좁은 어깨 위로 떨어져 나간

미소의 숨결

달빛으로 피가 도는

은은한 소식 밟아

이끼 푸른 볼로 스미는

풀벌레 소리

두근거리는 손 마디마디

푹 파인 턱으로

살아나는 미소여 

 

 

 

♧ 옥잠화 1 - 나병춘

 

그대의 향기 환하게 빛날수록

하늘은 깊어진다

그대의 나팔소리 그윽할수록

구름은 나비떼 되어 허공 속으로

 

날렵하게 산허리 타고 흐르는

천둥 회오리 잠잠해진 뒤안길

앞서거니 뒷서거니 라파라파 쿠푸쿠푸

긴꼬리제비나비 한 쌍

 

푸르디 푸른 언덕 아래

개여울은 알캉달캉 지줄거리고

허공을 질주하던 새들은

그늘 속 둥지를 찾아 숨고

 

산골처자 쓰달픈 입술 열어

살포시 적막을 깨트리는

푸르고 하얀 트럼펫 소리에

쇠백로 나르던 동산은 우련 물들어 

 

 

 

♧ 스팸메일 - 김금용

 

대학동창 이름으로 도착한 이메일

몇 년째 연락도 없던 친구가

로또 당첨이라도 되었나 늦둥이를 낳았나

제목도 “안녕‘이라니

후닥닥 열어본다

‘비아그라, 여성흥분제, 모두 있습니다’

 

스팸신고를 하고 삭제를 하여도

메일을 열 적마다

문고리를 잡는 끔발 미녀의 눈웃음과

저만 있는 것처럼

활짝 열어 재낀 유방과 엉덩이들,

어떻게 저 여인들은 사랑의 우물이 넘쳐서

사랑의 전도사를 자청하는 것일까

‘넘치는 내 사랑 나눠주겠다’고 하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무작정 먼저 주는 게 사랑이라는 진리를

그녀는 터득하고 실천하겠다는 것일까

거룩, 거룩 또 거룩한 여인이여! 

 

 

 

♧ 나의 발 - 민문자

 

얼마나 고단한 삶이런가

오만 곳 다 가야 하는 숙명

묵묵히 걷고 또 걷는다

 

주인님 받들고 어디든

가자는 대로 가는 발은

군말 없는 보살행이다

 

밑바닥 노예의 자리

고생 끝에 낙이라지

다음 생은 머리가 되라 

 

 

♧ 가난한 나무 - 문병란

 

뿌리는 어둠 속에 갇혀 있지만

욕망의 연옥을 뚫고

가지는 하늘로 뻗쳐

이파리마다 파닥거리는 햇살

봄이면 봉오리마다 꽃을 토해낸다.

 

설레는 그리움은 작은 잎으로 흔들리고

진한 사랑은 빛깔 고운 꽃으로 피우고

뿌리는 어둠을 빨아 올려

 

뿌리는 제3지옥

어두운 골짜기를 더듬어 가도

사랑은 꽃으로 미소 지어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의 날개

어쩔 수 없는 제자리 형벌을 견디며

겨울에는 뿌리로 숨 쉬는 고독을 참는다.

 

아 나도 한 그루 가난한 나무

꽃 피울 수 없는 그리움

안으로 감추고

하늘을 날 수 없는 외로운 천사.

 

오늘도 나무는

예토에 뿌리박고 서서

먼 길 떠나는 겨울 나그네의

외로운 그 마음을 꿈꾸고 있다.

 

 

 

♧ 사과꽃 아이들 - 신단향

 

 

사과나무 가지 사이 햇살이 꽃망울 터트린다.

하얀 이빨이 새콤하다.

하얀 사과꽃 빛깔이 노을과 장난칠 때,

꽃잎에 노을이 점 찍히고

동네 아이들 얼굴에도 붉게 노을이 핀다.

사과꽃잎 눈처럼 떨어진 밑동에서

풍선이 둥실 가지에 걸리면

사과 맛에 군침이 돌고 유월의 햇살은 꽃잎 진 자리마다

사과풍선을 익힌다.

 

사과가 익기 전 아이들은

자치기놀이로 웃음꽃을 피우고

위천수 냇물은 느린 몸짓으로 아이들을 품는다.

맨살의 바람이 내를 건너 물속 피라미와 놀면

아이들은 조약돌을 집어 물수제비 띄운다.

늙은 사과나무 베어진 둥치에도 새순이 돋고

부푼 사춘기의 젖망울이 블라우스 위로 도드라지면

초경의 자궁 속엔 사과가 익는다.

 

적과로 솎아낸 사과가 장맛비 흙속에 묻힐 때쯤,

원두막 빈방엔 사과 향기가 풋풋하고

사과나무 꼭대기에서 햇볕이 졸립다.

달빛이 와장창 사과나무를 후둘기면

사과 서리에 치마폭이 열리고

이빨이 시리도록 과즙을 튀긴다.

 

사과꽃 다시 피는 계절. 과수원 빈 원두막엔

갈비뼈 드러난 늙은 바람이 낙과를 굴린다.

흩어진 사과꽃 아이들이 노을 속에 들어가 있다.

불도저가 조금씩 과수원을 갉아먹으러 온다. 

 

 

♧ 항렬 - 김석규

 

딱따구리 멍텅구리 같은 항렬이지요

그런데도요

산에 사는 딱따구리는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요

집에사는 멍텅구리는요

뚫어 논 구멍도 못 뚫지요

그런데도요

딱따구리 멍텅구리 같은 항렬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