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흰명자꽃은 4월에

김창집 2014. 4. 8. 07:56

 

 

조금 쌀쌀한 날의 연속이다.

봄옷을 입고 나서면 춥고

겨울옷을 입고 나서면

맵시가 문제다.

 

어떻든 나이를 속일 수 없는

4월초의 나들이가 조금 불편해

옷장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전에는 옷 같은 것에 신경을 안 쓰고

아무거나 입고 나섰는데,

괜스레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잔인한 달이다. 

 

 

 

♧ 사월에는 - 송정숙(宋淑)

 

살금거리며 오는 걸음

어찌나 가벼운지

아직 겨울인가 했는데

개나리 피고 목련이 피고

다시 안 올 육십 번째 계절은

이렇게 빨리 와 있더이다

 

노랑 흰색으로 채색된 바람

잠결인 나무를 깨우고 다니면

나무보다 먼저 길을 나서는 사람들

바다에서 만난 사람은 마음이 넓고

숲길에서 만난 사람은 정이 많다

 

어떤 이는 섬진강에 가있고

어떤 이는 철쭉제에 가있고

어떤 이는 그저 무작정 떠난다고

또 하나의 어떤 이인 나는……

 

어우러짐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월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작은 풀잎 하나 작은 꽃잎 하나

모두가 경이롭다

 

 

 

♧ 그 여자 밥 짓는 여자 - 이희숙

 

중학교 입학하던 해

읍내에서 자취했다던 여자

부엌살림과 공개 연애한 지 삼십 년도 더 된 여자

쌓인 내공으로 치자면

입 다문 계집처럼 좀체 웃을 줄 모르던 목련도

방실방실 웃게 할 수 있지만

밥 짓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여자

손에 물 마를 날 없는 여자

채소와 육류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즐기는 여자

숨겨둔 정부처럼 좋아하는 해산물을

은근슬쩍 장바구니에 쏙 담는 여자

365일 세끼 밥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사랑과 정성으로 버무린 음식이 제맛을 내는 것처럼

인생도 꿈꾸고 노력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끝까지 웃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여자

그 여자 밥 짓는 여자  

 

 

 

♧ 적멸하는 것은 바람이 등에 있다 - 조철형

 

서산을 달구던 해가 붉은빛을 발한다

온 세상을 무지갯빛으로 쓸어안고 적멸중이다

 

태양이 아름다운 것은 적멸이 있기 때문

모든 살아숨쉬는 생명들의 화려한 순간은

바람이 등에 있다

 

오랫동안 흔들려 왔으므로

불멸을 꿈꾸던 뒷모습도 더 아름다워야 한다

 

희망 가득 찬 모습으로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움 가득한 미소로 이 땅에 머무르다가

또다시 바람을 등에 업고 적멸하는 것이다.   

 

 

♧ 한 걸음 뒤에서 - 임영준

 

가끔은 한 걸음 뒤에서

샛눈으로 으늑히 바라보리라

온 마음을 다 바치더라도

기대어 짐이 되진 않으리라

행복에 겨운 웃음은 억누르고

차분한 미소로 품어 안으리라

완숙하고 드넓고 빛나더라도

그대의 늪이 되진 않으리라

흐름을 굳이 거스르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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