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강좌 식구들과
모처럼의 서귀포 나들이
고근산에 올라 한라산을 우러르고
분화구에서 억새밭을 거닌 뒤
조용히 북쪽 7-1 코스 올레길로 내려 찾아간 하논엔
논농사 거의 끝내려다 남은
한 배미 논의 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중순 탐문회 경주 답사길에
대구에서 경주, 경주에서 영천을 거쳐 다시 대구로
오며 가며 보이는 건 과수원과 논밭에서
익어가는 벼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차에서 내려 대해보지 못했던 벼를,
논밭이 거의 없어 논농사를 하지 않는
제주에서 다 익은 벼를 만나니
너무 반가워 다가가 이렇게 마주 했다.
제주에서는 보리밥과 조밥이 주여서
제사나 명절 때나 두어 숟갈 맛보았던
그 곤밥의 재료가 아니었던가?
♧ 벼이삭 - 이남일
들판을 스쳐가는
바람의 무게를 느껴보았는가.
여름과 가을 사이 넘쳐 흐르던
햇볕의 무게가 느껴지던가.
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약속한 시간만큼 새벽은 오고
햇볕의 무게만큼 벼이삭은 고개를 숙인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농부가 뿌리의 깊이를 모르겠는가.
계절 따라 흔들리는 바람의 마음도
환한 가슴으로 느끼는 빛의 열기도
농부의 눈빛만큼 고개 숙이는
저 황금빛 꿈의 무게를 보라.
사랑이 깊을수록 서로에게
고개 숙이는 저 벼이삭의 무게를
♧ 가을 추수 - 오보영
이젠 거두어들일까 보다
그간 별로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네게
누런빛으로 가을 정취를 풍겨 기쁨을 주었으니
이젠
사랑하는 님
이른 봄 여린 새싹시절부터
그토록 날 아껴 보듬고 가꾸어주던
사랑하는 내 님을 위해
단단한 알곡이 되어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할까보다
최소한 지난 세월
님이 날 위해 애쓰느라 흘린 땀방울만큼은
채워
풍족함을 안겨주는 게
마땅한 내 도리인 듯해서다
비록 네겐
높푸른 가을 하늘과 조화를 이루던 들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보여주질 못한다 하드라도
내겐
기다리는 내 님을 위해 보답을 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란다
♧ 추수 - 김옥자
하늘 쳐다보고 한숨 한번 쉬고
서울하늘 그리다 눈물 지우고
마지막 열차는 언제쯤 오려나
기적소리만 무정하게
목을 빼고 울고 넘던
논두렁 굽이굽이 황금물결아
생고구마 볏단에 쓱싹 닦아
눈물 꾹꾹 씹어 삼키며
타는 가슴 부둥켜안고
가고 싶다 말 한마디 못해보고
엄마 정이 넘치는 막걸리
달콤한 한 잔술에 취하여
볏단 베개 삼아 불렀던 노래
시월의 황금벌판
눈부시게 타오르는 노을 빛
♧ 가을 소나타 - 김귀녀
이른 아침,
소나무 이파리는 하늘을 가리고
해무는 소나무의 몸통을 가렸습니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 듯
그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
우리가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만
나는 떠나간 당신을 기다리는 것처럼
숲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제껏 기다렸지요
가을, 이른 들판에서는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풀벌레가 우는 날이면
풋사랑을 기다리는
가을 여인이 되곤 했습니다
♧ 가을길 - 이정자
햇살이 그윽히 벼이삭에 내려앉듯
벼이삭이 겸허히 구부러지며 햇살을 받아안듯
지상의 곡식이 무르익는 가을 날
내가 당신에게로 당신이 나에게로
걸어와 마음의 손 마주 잡는 날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걷는다
풀벌레 소리 발길에 채이고
그대 모습 가슴 가득 밟히는
혼자 걸어도 혼자가 아닌
가을길
♧ 가을들판에서 - 김점희
가을볕이 좋아 바람 따라 길을 나선다.
초록의 싱싱함만 있어도 좋을 들녘은
잘 익은 가을 내음과 어여쁜 들꽃향기,
또르르또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가 있어 더욱 정겹다.
중년의 멋스러움으로 익어 가는 벼이삭들은 여유롭고
멋쟁이 백로의 우아한 몸짓에 가을은 한층 아름답다.
오솔길 걷다 투두둑 떨어진 밤송이,
토실토실 알밤 하나 꺼내어 오도독 깨물며 가을을 맛본다.
이 나무 저 나무 떼지어 노닐며 노래하는
참새들의 오페라는 무료공연이요,
넓고 높게 펼쳐진 푸른 하늘 뭉실뭉실 피어나는
하이얀 구름무대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온 산에 단풍교향곡 울려 퍼지면
벅찬 이 감동 어찌 누를까.
그 날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호흡이 가빠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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