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접세트에 변화를 준답시고 의자 방향을 바꾸다보니
그 동안 갇혀 있던 책들이 우르르 무너진다.
그걸 정리한답시고 퍼질러 앉아
이것저것 손에 닿는 대로 다시 꽂기도 하고
옛날 생각이 나 읽어보기도 하면서
반나절을 보냈다.
그 중에 몇 권 시집을 따로 꼬불쳐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기에 소개할 예정이다.
이 ‘백록을 기다리며’ 시집의 주인공은
고정국 전 제주작가회의 회장이다.
이 시집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겪지 못한
그만의 ‘하늘’을 우러르는 세 가지 사연과 함께
시인이 숙명처럼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산문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시집 제목 바로 아래 새긴
‘더 큰 만남을 위해 어둠을 깊게 하라’는
좌우명(?)이 가슴에 와 닿는다.
시를 읽다가 가을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몇 작품을 골라
한라구절초와 같이 내 보낸다.
♧ 시월의 빛
이별에 익숙한 자의 살짝 붉힌 눈시울처럼 낙엽을 준비하는 갱년기의 관목들처럼 비로소 몸으로 말하는 시월 한국, 저들이 곱다. 표정이 밝은 것만큼 제 슬픔도 깊었다는 구절구절 구절구절 멍투성이 구절초가 푸르게 삭발을 하고 종일 저렇게 웃는 걸 봐.
봄여름 다 지나도 안색 한 번 바뀐 일 없어
떠날 때 임박해서야 말문 여는 고추잠자리
멍석에 쏟아낸 진실이
몸빛보다
더
부셔.
♧ 안개지대
모처럼 진실이라던 실선(實線)다 무너지고, 소수점 이하 언어들이 가지 끝에 눈물 맺힐 때 우리는 깜박이 켜고 저문 길을 나선다. 시대의 바른 대답을 안개 속에서 찾을 거라며 축축한 손길 위로 촛불 받아든 달맞이꽃 무작정 끌고 온 길들이 평지에서 더디다. 허락하지 않은 길에도 샛길 하나 숨겨둔다는 고독한 산보자의 그 우울한 윤곽 밖으로 초록빛 화살표 하나가 걱정스레 찍힌다.
♧ 산방의 휴일
꽃향유 약불에도 가을산은 펄펄 끓었고 이별을 예감한 꽃들이 다투어 입을 맞췄네, 발등의 루즈 자국이 고백처럼 아팠네.
입산통제구역에 길이 하나 숨어있었네. 예쁜 발자국이 이쯤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 절정을 치르는 풀여치, 풀여치 소리.
바람이 어깨 너머 음풍농월의 시를 읊네. 묵묵히 쇠똥구리가 오름 하나를 굴리고 있을 때 사내는 바짓가랑이 도꼬마리 씨를 뜯네.
♧ 구월 허수아비
세 차례 참을 먹어도 배가 고픈 남도의 구월
사백 밀리 폭우를 쏟고 속이 편치 않으셨는지
하늘이 추녀로 와서 호박 한 덩일 내리시네.
새 쫓는 총포소리에 습관적으로 몸을 낮추는
고분고분 간척지구의 벼 포기들을 보아라
저들만 파업을 모르고 초과달성해냈구나.
일흔을 족히 넘겼을 처 당숙뻘 허수아비가
틀니로 생쌀 씹으며 신토불이를 뇌고 있을 때
빨갛게 “쌀 협상 반대!” 고추잠자리 눈총이 맵다.
♧ 비양도 시월 아침
늦도록 불판을 깔며 왕소라 굽던 바다
월척 지느러미에 수평선이 휠만큼 휘고
바위도 새들을 불러 아침 젖을 물린다.
가을 초엽부터 집단적으로 몸을 흔들던
뼈뿐인 억새 무리가 깜빡 눈을 붙인 사이
달빛이 은갈치 떼 몰고 섬을 빠져나갔구나.
사람 속도 보일만치 분리수거 깔끔한 아침
바위틈 해국 송이가 직박구리 소리로 울면
펄랑못 수초들 사이로 금발 머리의 태양이 뜬다.
♧ 구절초 피었구나
눈 주면 바람 앞에 늘 불안한 꽃이더니
푸른 환자복에 요양원을 빠져나온
저혈압 안색을 하고
구절초가
피었구나.
뜻은 하늘에 두고 줄기를 땅에 묻으며
칠전팔기 끝에 관절 하나가 비었다는
구구구 말을 더듬던
그도 같이
서 있구나.
이 땅의 모든 꽃은 다 그만한 아픔이란다.
소망에 꽃잎이 다치고 절망 앞에 마디가 굵은
노숙자 마른기침 소리
온 들녘이
꽃이구나.
*고정국 시집 '백록을 기다리며'(연인M&B, 200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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