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은 눈이 제대로 내리지 않아
눈밭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겨울을 나나 했는데,
이곳 제주 산간지방에
이틀 전부터 눈이 내려
어제는 눈밭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힐링했던 하루였다.
춥지도 않은 날씨
간간이 흩뿌리는 눈을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 저녁 눈밭 - 권경업
소설(小雪) 지나 하늘 흐려지면
자작나무 몇 둥거리 더 삼키는 구들목
눈밭 성긴 저녁은 일찍 저물었다
묵정밭 끝머리 새재 오름길
하얗게 지워졌을까
간간이 풍문 지고 넘던 등산객 발길 끊겨
겨울이 조개골 깊숙히
칼 가는 소리를 내면
알몸의 상수리숲 온 밤을 떨었다
♧ 싸늘한 눈밭 사슴처럼 걸어와서 - 서지월
한번 들어보게나
바람이 불 때 말이지
나무의 나뭇가지들이 즐거운 비명 지르면서
놓아버린 새를 그리워할 때
봄은 오고
새잎 피워낸다는 사실을
거기 새론 음악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 뜨거운 피 데워지고
다시 잔을 들면 피어나는 꽃송이들 탐스럽지 않겠는가
햇빛 나고 달빛 나고 별빛 더해주지만
더러는 먹장구름 몰려 와 비 퍼부면서
너 가만 있거라 너 가만 있거라
물고문 은총 내리지만
그게 어디 사는 재미인가
진실로 우리가 우리 마음의
담도 뭉게고 감시와 철조망을 철거할 때
한껏 푸른 종소리 울려오겠지만
이웃간의 담이 높아질 때
찾아드는 겨울은 살벌하고
이처럼 우리가
싸늘한 눈밭 사슴처럼 걸어와서 시린발도
시리지 않게 포근한 금잔디 노란 민들레의
어머니 같은 그리움 갖자는 것이야
더러는 개개인 이익을 위해
외투 꺼내 입고 혼자 포근한 척 하지만
생명이, 세상에 버려진 몸뚱아리가
가고 없으면 남는 것은
빈 집 뿐일세
콩깍지같이 단단한 쓸데없는 과욕일랑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 옷 벗으면 너 옷 벗듯
마음의 화장을 걷고 흥분하지 말고
천국을 향한 하나씩의 계단
아름답게 밟고 가는 잠깬 목동의
피리소리를 듣자는 것이야
♧ 하얀 눈밭에 - 하영순
시골길
하얗게 쌓인 눈밭에
강아지처럼 뒹굴고 싶어
자동차를 세워놓고
마음은 뒹굴고
나는 걸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옥양목 갚은 눈밭
뽀드득 뽀드득
들리는 소리
눈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한참을 걷다
돌아오면서 그 말뜻을 알았다
이 형광등
네 발자국을 보라는 말이었구나.
눈밭에
그대로 흘려 놓은 내 마음
살며시 지켜보는 저 햇살
에구
부끄러워라!
♧ 눈밭에 서서 - 이향아
벌판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눈은 여간해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흐느낌으로 세상을 파묻는다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하얗게 되어서 서늘히 식을 것이다
불길이 꽃밭처럼 이글거리다가
그을린 삭정이 검푸른 연기까지
끝내는 흰 재로 삭아내리 듯이
우리도 나중에는 하얗게 될 것이다
햇발 아래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과
이별을 흔들던 진아사 손수건
항복을 알리는 창백한 깃발과
핏기 없이 죽어가는 마지막 얼굴
눈은 자꾸만 오고
세상은 자꾸만 파묻히고 있다
지금은 찬연하여도
희게 희게 바래서 몰라보게 되면
비로소 끝이라는 걸 믿어도 될까
눈 덮인 벌판을 바라보면
이미 심판이 끝난 것들이
눈발 되어 차분히 내린다는 것을
황홀한 꿈에 잠긴 영혼들의 세상을
아주 가까이서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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