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대나물 - 강봉수
불 칸 마을
허공에 뿌리 뻗은 팽나무 홀로
터를 지키고 섰다
우두둑 우두둑
싸락눈이라도 내리면
고향 잃은 숨들이 돌아왔을까
허물어진 밭 돌담
숭숭 뚫린 구멍사이로
광대나물 보랏빛 웃음이 발그레
♧ 보리밭에서 - 김문택
바람은 에어로빅 선생님
간간이 옆구리 간질이면
어깨는 으쓱으쓱
엉덩이는 실룩실룩
육지의 파도,
푸른 옷자락은 춤을 추지요
햇살은 알곡의 회초리
종아리 멍들게 때리면
놀빛 귓불
알알이 영글어
꽁보리밥 한 그릇,
여섯 살 적 허기를 달래주지요
6남매 한 스픈 더 먹어보젠 낭푼이 긁는 소리
♧ 그 오름에 올랐을 때 - 김병택
아득한 파도소리만 들렸다.
수직으로 쌓인 고난의 역사가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무들이 우림하고 꽃들이 지천이어도
고난의 역사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오름이 품고 있는, 어두운 동굴 안에는
억울한 영혼들이 거처했고
여기저기에 뒹구는, 찌그러진 그릇들은
그들의 고단한 생애를 증언했다.
습기 찬 무적(霧笛) 소리만 들렸다.
곳곳에 널려 있던 황색 낙엽들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몰려왔다.
♧ 민들레치과 - 김성주
황금식당2층 민들레치과 흐린 유리창에
민들레 피어 있다
해와 달이 곱게만 다녀가신 것은 아닌 듯
뜯겨져 있는 황금원반
낯선 얼굴들 사이에 누워
툭, 툭, 꽃잎 지는 소리 혼자 듣는다
영토에서 쫓겨난 갈기 빠진 수사자처럼
저 민들레 지워지겠지
어금니 두 개는 그렇게 떠났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금식당 수족관,
제 세계가 아니어도
바닷장어 어렝이 광어 멍게 소라들
아직 살아있다
오늘 하루
씹어 먹는 일 삼가야 한다는 의사의 말
식당 안 웅성거리는 말들을
우적우적 씹어 넘기는 허기
♧ 아카시아 꽃 - 김순선
싱그러운 오월 어느 날
바람난 봄처녀 같이
꽃향기 폴폴 날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는 나무
하얀 조가비로 주렁주렁
몸치장 하고
그 옛날 아카시아 파란 잎으로
사랑 점치던 소녀들 그리워
꿈을 꾸듯 추억에 젖어
실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하얀 이 드러내고 수다 떠는
소녀들 웃음 같은
오월 햇살에
눈이 부시다
♧ 어쩌지 - 김영미
손 놓고 넋 놓고
우두커니 사물인 것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꽃이 핀다
아기가 하품하듯이
꽃잎이 벌어진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데
꽃은 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꽃만 피고
♧ 용흥사 - 이윤승
겨울엔 눈 푼푼이 내리고
하얗게 눈 쌓인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그녀가 며칠씩 머물다 떠나가곤 하던 이곳
매화꽃 한 잎 또 한 잎 꽃문을 연다
세상과의 거리는 얼마인가
찰나의 봄, 작은 배를 타고 건너고 싶다
한 올 한 올 그늘을 짜며
선 채로 묵언수행 중인
삼백오십 살 느티나무 보살 곁을 조신하게 지난다
지금 편안한가
말없이 물으며
지긋이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미륵대불
댓돌 위에
가지런히 댓잎 몇 켤레 놓여있다
바람 같은 생을 생각하다가
보리수나무 그늘을 생각하다가
마음 나던 길을 생각하다가
계곡물소리인 듯 맑은 풍경 소리 따라가니 나 문득 사라지고
용구산 자락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 대웅전에서
수백 년의 기억을 갖고 있는
동종의 깊고 푸른 새벽 종송(鐘頌)
세상을 깨우며 울려 퍼지고 있다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4월호의 시와 청보리밭 (0) | 2017.04.08 |
---|---|
역류동인 '봄꽃시편' (0) | 2017.04.07 |
'우리詩' 4월호의 시와 벚꽃 (0) | 2017.03.31 |
서상만 '산림문학' 통권25호 초대시 (0) | 2017.03.29 |
제15회 '내일을여는작가' 시 당선작 (0) | 2017.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