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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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작가' 2018 겨울호의 시

김창집 2018. 12. 26. 20:06


저녁의 말 - 고영숙

 

바람이 흐릿하게 부는 저녁

 

입을 열면 쏟아지는 은백색 비늘들

 

몸살바람에 기우뚱하더니

 

그물에 뛰어드는 날선 입질

 

쓸쓸한 가시가 박힌 세치 혀

 

핏물이 번지는 말문을 토막내버리고

 

주름진 양파와 잠잠하던 파도

 

직성이 풀리는 칼칼한 파도

 

흥건히 맺히는 물결의 무늬들

 

하얗게 염분을 토해내는 날들

 

다물어지지 않는 아가미를

 

-낚아채는 바늘

   

  

해바라기 - 김경훈

 

오직

줄기 하나에

꽃 하나

이 단순한 저력이

알찰수록

고개 숙인다

여물수록

해 바라지 않는

이 입도적 자존

다만

꽃 하나에

줄기

하나

 

 

 

손님 - 김광렬

 

꽃샘추위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몸살감기처럼

 

부실한 잇몸을 질책하며 우지끈 아파오는 치통처럼

 

사과 잇자국에 번지는 붉은 핏방울처럼

 

이른 새벽이면 슬그머니 면도날 들이밀며

 

, 신경을 베고 가는 두통처럼

 

땅바닥에 뭉텅 한목숨 바치는 동백꽃처럼

 

아픈 사람이 있다

 

그가 문밖에서 떨며 울고 있다

 

 

 

네팔 소년과 나 - 김규중

 

나는 두 시간 걸려

버스로 출근하는 데요

 

TV에서 네팔 소년은

두 시간을 산 넘고 들판을 걸어

등굣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지구상 어딘가에

두 시간 걸려서

매일 학교 가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직업으로

두 시간을 버스 타지만

네팔 소년은 배움의 소중함으로

산 넘고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자고만 한다 - 김병택

 

이제는, 아득한 곳에

숨어버린 세월을

얼마나 힘들게 견디어 왔는지

지금까지도, 옛 추억은

고이 간직하고 있는지

한 마디의 물음도 없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오로지 이 자리, 우리 얼굴의

빛바래고 거친 모습뿐인데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의

메마르고 작은 모습인데도

한 조각의 생각도 없이

 

오늘, 동네를 산책하다가

삼십 년 만에 만난 친구는

회색빛 얼굴로 연신 웃으며

사진을 찍자고만 한다.

우리를 오래오래 만나게 할

사진을 찍자고만 한다.

 

 

 

창백한 푸른 점 - 김성주


-광활한 우주에서 찍은 먼지 같은 지구를 보고 과학자들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 명명했다

 

시간에 목줄을 매고 서점에 들러 기웃거리다

엄청난 자장에 휩쓸려 속수무책 빨려든 한 점

-동아과학 까만 페이지에 먼지로 떠있는

그때, 시간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약속시간까지 남은 15분이 나를 인도불럭 위로 끈다

초침의 재촉에 저항하며 핸드폰 검색창을 연다

 

먼지

가늘고 보드라운 티끌

 

티끌

왔다 돌아갈 곳

 

공간적인 또는 추상적인 자리

 

다음 검색으로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시간이 멈춰선다

내 몸이 앞으로 조금 구부러진다

 

황사로 뒤덮인 도남 오거리 빌딩 그늘

거기, 호박 다섯 개 부추 두 단 늘어놓은 할머니의 외눈

둥둥 떠 있다

 

, 창백한 푸른 점

 

 

 

겨울, 탑동 - 김수열

 

물마루에서 바람을 타고

자리밭 지나 원담 지나

동글동글 먹돌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때구루루 때구루루 몰려왔다가

 

해안 가득 하얀 거품 풀어놓고 다시

때구루루 때구루루 멀어져가는

저녁놀이 숨 막히던 바당은 어디로 갔나

 

먹보말 돌킹이 조쿠쟁기 물토색이 구살 오분작

보들락 코생이 어랭이 객주리 물구럭 각재기

 

불러도 다시 부르고픈 구수한 것들은 모두 어디 갔나

 

뺄래기똥 돗줄레 삐쭉이 스프링 뽕똘 심방말축 동냥바치

 

불러도 대답 없는 그리운 것들은 지금 어디 있나 


바람은 불고

중환자실의 시한부 생명처럼 바다는

가만히 고여 아무 말이 없고

비는 날리고  

   

 

탈출 - 김순선

 

맛보라고 옆집에서 건네준

바닷게 한줌

비닐 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다음날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데

현관문 틈에 끼어 있는 게 한 마리

밤새 냉장고를 기어 나와

사막 같은 거실을 지나면서

고향을 꿈꾸던

선구자

거품 물며 가도 가도

옆길로 빠지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며

출렁이는 바다를 향하던

위대한 행보


                           *제주작가2018년 겨울호(통권제6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