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산실 - 김석규
국어사전의 돌쩌귀에 불이 난다.
흔해빠지도록 어휘들을 부려놓고
낱말을 마름질한 대팻밥만 수북이
수달이 늘어놓은 물고기들이다.
연신 투망질을 해대지만 번번이 허탕
용도 폐기해야 할 불량품 폐자재
구겨서 내버리거나 불 속에 던져버리거나
그래도 끝내 포기할 수도 없어
톱질소리 망치소리 돌 쌓는 소리 사개 맞추는 소리
언어로 사원을 축조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다.
♧ 간구하옵니다 - 임병호
아내의 육신이 아프면
남편의 영혼에는
붉은 눈물이 고입니다
꿈속에서도 아내를 간병하면서
소년처럼 작아진
정순영 시인을
언제 거구의 남자라고 하였습니까
참으로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님이시여
먼 길
떠나려는
아내를 가로 막고 있는
저 남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 사람, 그 너머를 - 박원혜
흐린 말 꼬리를 밝히지 않는 사람
너머를 기웃거려 본 적 있다
그 너머 넘실거리는 길이라도 붙잡고
귀를 기울여야한다 설핏 닫힌 문을
밀친 적 있다 힘껏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가슴 구석구석을
더듬어 나갔다 뭔가 가끔 솟구친다
신발에 짓이겨진 흙덩이를 비볐다
사람 그 너머로 무엇이 되어 붙었다
날마다 길 가운데서 씨름하고 있다
♧ 시인의 집 - 이규홍
온종일 햇볕 드는 양짓말 뒷동산 밑
백 년은 됨직스런 참나무 우듬지에
한 쌍의
긴꼬리까치
시인의 집 짓고 있다
싱싱한 오브제를 어디서 물어오고
발랄한 아이러니 어디서 꺼내왔나
수천 년
이어온 비법
둥지 틀기 달인들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는 보금자리
수컷은 망을 보고 암컷은 몸을 푼다
포란할
때가 되었나,
곧 나올라 새 생명
♧ 빛의 뿌리 - 정온유
빛에 흔들리는 하루가 밤을 넘는다
어둠 속으로 빛의 뿌리가 내린다
밤들이 점점 굵어지고
벽들은 경직된다
두꺼워진 공간이 침묵으로 가득하다
물컹하게 잘 익은 침묵을 담아낸다
무작정 건너온 공간,
그 밤이 깊다
♧ 모란동백을 듣는 밤 - 강동수
어디선가 모란꽃이 피어 우는가
별들도 숨죽이는 밤
동백은 겨울의 청춘을 지나
지금은 잎새만 무성하다
모란과 동백이 공존하는
노래 속에서
가수는 나를 잊지 말라고
세상은 바람 불고 쓸쓸하다고
저음으로 호소하고 있다
*노래를 만든 이는 화가畵家
노래를 부른 유명가수는 화가를
흉내 내다가
쓸쓸히 잊혀지고 있다
어디선가 동백꽃 하나
바람에 떨어지고 있다
노래는 마지막 소절에서 흐느끼고 있다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소설가이자 화가인 이제하 작사 작곡의 노래.
♧ 부활절 - 임채우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 한 사내가 죽었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를 따르는 몇 사람이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이 사건은 줄기차게 믿는 자들에게 진실이 되었다. (복장 터지는 순환 오류라고?) 믿기지 않는 일도 이처럼 구체적이면 무덤을 깨고 나온다. 한 오리 머리카락처럼 세세하고 생생한 기록만이 누천년을 너끈히 이기는 법이다.
♧ 전봇대 - 윤순호
지금은 광고 시대,
넘치는 행인만큼 자료는 넉넉하다
눈높이를 가늠한 위치 선점만이 살길이다
불편한 시각은 외면하지만
키 높이라면 굳이 부담이 없다
판정꾼들의 채점 기준은 높이와 각도,
화려한 원색은 덤이다
싸운 흔적들이 덕지덕지 붙은 전쟁터
승자의 계산은 만족했을까
다디단 유혹을 새긴 촘촘한 빌라 족자를
거미줄이 훌쩍 끌어올려
탱탱하게 저지선을 치고 있을 때
꼭대기엔 자동차 딜러가 아예 철판을 깔았다
실력파 과외가 틈을 비집고
금줄에 낀 창호지 같은 전화번호 앞세워
갈가리 나부낀다
운이 좋다면 강력한 청 테이프가
끈질기게 시선을 붙잡아 줄 것이다
시선집중을 노린 주말은 적중할 것인가?
♧ 숫돌 - 민구식
고향 빈집에 들렀다
샘가에 뒹굴고 있는 허리 부러진 숫돌
제 몸 갈아낸 돌의 나이테
얼마나 많은 날을 세웠던가
얼마나 단단한 고집들을 구슬렸던가
강한 것은 연한 것이 구스르고
연한 것은 강한 것이 구스르는
연마의 법칙
아버지 지문 돌가루에 흘러가고
어머니 잔소리가 칼자루만 남아
난도질당하는 샘가
무딘 날이 있다
대장간 갓 나온 검은 칼도
숫돌의 다스림을 거치지 않고는
제 구실을 못하는 엇배기*
숫돌의 날숨을 받아 새파랗게 세워졌을 때
세상 겁 없이 쳐내어 길을 내는
우물가 숫돌 나이테
---
* 엇배기 - 제 몫을 다하지 못해 반품의 품삯을 받는 초보 일꾼.
- 『월간 우리詩』 2019년 5월호(통권371호)에서
* 사진 : 위로부터 - 앵두나무 황매화 박태기나무 라일락 남방바람꽃 백작약 이팝나무
금새우란 모래지치 얼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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